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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Feb 24. 2021

반닫이, ‘그’의 여정

영국에서 온 서른 살 청년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문화적 충격은, 소음이었다. 살러 온 한국은 활기가 넘쳤지만 그만큼 소리도 넘쳐났다. 가게마다 대형 스피커를 밖에 내놓고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그 소리들이 한꺼번에 엉켜서 머릿속에서 웅웅거렸다. 조용한 곳이 필요했다. 

기숙사 건물에 같이 살고 있는 프랑스인 교수의 집은 골동품 가게이라고 할 만큼 옛날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석상이 얼마나 많던지 3층에 있는 그 집 바닥이 내려앉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어느 날 그 교수가 장안평(지금은 ‘답십리고미술상가’라고 불린다)을 데리고 갔다. 그날, 청년은 고가구에 매료되었다. 조선의 목가구는 중국이나 일본 가구와 달랐다, 아니 세상 어느 곳의 가구와도 달랐다. 그는 마침내 조용한 장소를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된장찌개와 쌍화차

그 후 주말을 늘 거기서 보냈다. 그 오래된 나무의 촉감과 결, 널판의 결속 방식, 금속 장식의 모양과 상징, 재미난 열쇠들, 뭐 하나 흥미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거기서 선생님들을 만났다. 몇몇 고가구상은 조선 시대 목가구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고수였다. 하루 종일 머무르면서 이것저것 묻는 그를 예쁘게 여겼는지, 그들은 배달 온 된장찌개 백반을 같이 먹자고 숟가락을 쥐어줬고, 노른자 푼 쌍화차를 권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문하생’으로 보내면서 제법 전문가가 되었다. 웬만한 가구는 이리저리 둘러보고 구석구석 만져보면 제작 시기를 추정하고, 가구 모양과 장식의 특징으로 어느 지방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식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강화, 박천, 밀양, 남해, 남원, 익산, 김해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그곳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구별해냈다.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곁에 두고 싶어진다. 숙소는 조선 팔도 여러 곳에서 만들어진 와 으로 벽을 다 두르고, 가구 위에 가구를 올려놓는 지경이 되었다. 나는 그 즈음에 그와 결혼했다. 


결혼 즈음해서 기념으로 산 이층장이 있었다. 그건 내가 골랐다. 한남동 앤틱 가게 주인이 장 문을 열면서 이런 설명만 안 했어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거다. “자세히 보면 나무들끼리 꽉 물려 있지 않아요.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있지요. 그렇게 숨 쉴 공간이 있어야 오랜 세월 동안 틀어지지 않는답니다.” 그때만 해도 나도 그러리라 다짐했다. 긴 세월 동안 잊고 산 날이 대부분이지만. 


옛 주인의 흔적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한국에서 살다가, 영국으로 왔다가,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왔다. 스무 개가 넘었던 고가구는 그 과정에서 대부분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네 점만 남았다. 한때 우리와 함께 살았던 가구 중에 ‘박천 반닫이’가 있었다. (궤를 일명 “반닫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널판의 반이 열리기 때문이다. 앞으로 열리는 것을 앞닫이, 위로 열리는 것을 윗닫이라고 부른다.) 오래된 가구는 다 옛 주인의 흔적을 어디엔가 품고 있겠지만, 이 반닫이가 특별했던 것은,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평안북도 박천 지방의 반닫이는 날카로운 징으로 구멍을 뚫은 검은 쇠판으로 전면을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붉은 나무에 박힌 검은 금속 장식이 주는 강렬함도 그렇거니와 그 크기가 주는 존재감도 남달라서, 우리는 위엄을 갖춘 이 궤를 ‘그’라고 불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떤 가족을 함께 만났다. 앞 널판을 열자 안쪽에 발라놓은 빛바랜 종이가 보였다. “…는 수령 김일…” 앞뒤가 찢겨서 다 볼 수 없었으나, 그건 <노동신문>이었다. 낡은 종이는 30년은 족히 된 것 같았다. 신문 말고도, ‘파국 만드는 법’이라고 적혀 있는 요리책의 한 면, 기술공업 관련 책의 일부였을 페이지도 붙어 있었다. 오래된 갱지에서 흐릿하게나마 글자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다. 한 가족이 그려졌다. 그 상상을 글로 쓴 적이 있었다. 


“나는 이 가구를 통해 북한을 좀 다르게 느끼게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책으로 공부했던 ‘위대한 수령’의 북한이 아니라, 기술자 남편과 요리를 하는 아내가 이 장군같이 잘생긴 가구를 안방에 두고 살았던 구체적인 공간으로서 북한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도 아이들이 있었을 터이고, 이 가구는 식구들의 옷이나 이불을 넣어두는 데 쓰였을 것이다. 그 부모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랐을 것이다. 저녁이면 둘러앉아 그날 일어났던 일을 두런두런 이야기했을 것이고, 이 가구는 한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그 이야기를 함께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풍족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나 늘 ‘헐벗고 굶주리는 인민’이었던 것도 아니고, 정치 교육을 받기 위해 모임에 나가야 할 때가 많았지만 동시에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을 잊고 사는 시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사는 것처럼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름 불러주기’, <민족화해> 12호, 2005년 1~2월)


남는 것은 이야기뿐

그가 우리 집까지 온 여정은 짐작이 된다. 장식을 꼼꼼히 살펴본 남편은 그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친 흔적이 별로 없는 것을 보아 큰 고생은 없었던 것 같다. 그곳이야 대령강과 청천강이 만들어놓은 비옥한 박천평야가 있었으니 다른 지역보다 살만 했을 거다.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1995년 즈음의 대기근 때문이었을 거다.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 불린 그때, 사람들은 살기 위해 무엇이든 값나가는 물건을 중국으로 내다 팔았다. 어느 날 장정들이 그를 들어 어디론가 옮겼고, 얼마 후 깊은 밤에 그는 신의주에서 단둥으로 가는 밀선을 탔으리라. 중국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남한 상인의 눈에 띄어 한국으로 왔을 거다. 북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귀한 물건은 한국에서 몇 갑절로 팔리던 때였다. 서울 장안평 고가구점 한구석에 있던 그가, 고요함을 갈구하며 서성이던 영국 청년을 불러 세웠다.



우리는 2004년에 영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그와 헤어졌다. 새로운 주인이 된 이는 우리 옆집 사람들이었다. 자폐 증세가 있는 어린 아들을 돌보느라 늘 고단했던 그 집 엄마는 그 앞에 한참 머물더니,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된다.”고 했다. 그가 이번에는 지친 그녀에게 말을 걸었나 보다. 그 가족은 곧 아일랜드로 이주할 것이라고 했다. 그다음 소식은 모른다. 아일랜드로 갔을까? 아직도 그 가족과 살고 있을까? 


글, 사진제공/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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