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부르는 말에 대하여
‘말’ 앞에 자주 오는 말들은 주로 작고 가벼운 것들이다. ‘그깟 말’, ‘그냥 말’, ‘겨우 말’. ‘그냥 말한 걸 가지고 왜 이래?’, ‘왜 자꾸 말꼬리를 잡아?’라는 말들은 ‘말은 말일 뿐, 무엇도 실재적인 힘을 행사하지 않았음’에 대해 강하게 항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깟’ 말 때문에 상처받고, 자주 낙담하고, 다투고, 갈등한다. 겨우 말뿐인 그 말이 사실은 가장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깟 사소한 말들이 사실은 가장 우리를 위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 국립국어원에서는 친족 간의 호칭과 관련하여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개선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을 수용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아가씨, 도련님’으로 칭하던 시댁 식구에 대한 호칭은 ‘○○씨’ 등으로, 바깥 외(外) 자를 쓰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와 동등하게 양가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로 부르되 변별을 위해 지역, 별명, 성함 등을 고려하여 지칭하는 것으로, 균형을 이루지 못하던 ‘시댁’과 ‘처가’는 ‘시가와 처가’ 또는 ‘시댁과 처가댁’으로, 오래오래 불러온, 그리고 불려온 호칭들을 바꿔가고자 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에서는 ‘이모, 언니, 삼촌’ 등의 친족 호칭어가 안면이 없는 공적 사이에서도 확장되어 사용되는 경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하고, 가장 친근하다고 여겨졌던 친족 호칭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는 상당히 이례적이고 도전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혹자는 한국에서는 관계를 알지 못하면 어떤 말도 시작할 수 없다고 할 만큼 한국어가 관계에 종속적인 언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나이, 지위와 무관하게 이름을 부르는 영어권의 호칭 문화에 비해 지나치게 권위적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한국어야말로 나와 대화하는 상대방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고민하는 언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복잡한 호칭은 단지 수직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자리매김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화 참여자의 사이를 ‘섬세하게’ 고민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객관적이고 순수할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언어가 순수하다면, 우리는 애써 호칭을 고민하지도, 언어의 사용에 대해 고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간호부’라는 직업의 명칭이 ‘간호원’으로, 그리고 다시 ‘간호사’로 변화하게 된 데에도 ‘-부’, ‘-원’, ‘-사’ 등 직업을 나타내는 접미사에 반영된 사회적 가치 및 태도를 고려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을 나타내는 명칭들도 낮잡아 이르는 뜻이 담기지 않도록 ‘청각 장애인’, ‘시각 장애인’ 등으로 이름을 다듬어나가고 있다. ‘장애인’이라는 말 역시 한때는 친구라는 의미를 담아 ‘장애우(友)’라고 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그 역시 장애인에 대한 제한적인 시각을 드러낸다는 성찰에 따라 최근에는 다시 ‘장애인’으로 명명하고 있다.
또 ‘다문화’와 같이 처음에는 좋은 취지로 만든 용어가 사용됨에 따라 누군가를 낙인찍고, 배타적으로 구분하여 사회적 차별의 기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쓰이는 경향성이 나타나는 예도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말뿐이라고 했던 그 그깟 말을 사실은 상당히 집요하게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오래되고 내 귀에 익숙한 언어라고 할지라도 그 말로 인해 누군가 마음이 무너지는 심정을 느낀다면, 무례함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그러한 말은 우리 사회와 우리 공동체에 이로운 언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예민한, 때로는 피로할지도 모를 호칭의 세계에서 어쩌면 가장 필요한 일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말하는 사람, 이름을 정하는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불릴 존재, 정해진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해야 할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가리키는 언어를 다듬을 때에는 그렇게 청자(聽者)의 마음을 먼저 묻고, 듣고, 바라봐주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호칭이든, 지칭이든, 서로를 불러주기 위한 말들에 대한 논의가 풍성해지는 것은 비록 그 과정은 지지부진할지언정 참 따듯하고 용기 있는 일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시아버지께서 나를 한껏 존중하여 불러주고 싶으셨는지 종종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르신다. 겨우 말뿐인 말일 뿐인데, 그 말 속에 때로는 귀한 마음들이 머물기도 하는 것 같다.
글/ 김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