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Apr 12. 2021

등산화, 봄이 왔다

지하철 4호선 산본 역사 안에는 뉴코아아울렛이 있다. 전철에서 내려서 밖을 나가려면 아울렛의 할인 행사장을 지나치게 된다. 내가 가진 옷의 절반은 거기서 산 것 같다. 거기에는 옷값의 심리적 상한선 2만 9천 원을 넘지 않는 옷들이 많았다. 다닥다닥 줄지어 걸린 옷들 사이를 기웃거리다가 Y 선배를 만난 적이 있다. 다가가서 아는 체를 했다. “언니도 여기서 옷 사세요?” “아, 안녕. 여기 너무 좋지.” Y 선배와는 30년쯤 전에 대학원에서 만났다.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성당에 다니고,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섯 살 나이 차이도 그렇거니와, 살갑지 않은 내 성격 탓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몇 장면도 따지고 보면 선배가 초대한 것이었다. 



뒷산

“역 앞 극장에서 <밀양>을 하던데, 같이 보지 않을래?” 저녁에 문자가 왔다. 심야 상영에는 관객이 별로 없었다. 자정이 훨씬 넘어서 끝났는데, 차마 그냥 헤어질 수가 없었다. 술집이었는지 찻집이었는지 모르겠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마주 앉아서 줄곧 담배를 피웠던 것은 기억난다. 선배도 나도 평소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건 영화 탓을 해야 한다. 아무튼 선배와 나는 그렇게 가끔, 느닷없이, 깊이 만났다.

그 선배가 암에 걸렸다. 참고 견디는 사람들이 암에 걸린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어느 일요일 저녁에 동네 찻집에서 만났다. 많이 여위어서 팔도 다리도 더 길어 보였다. 두건을 쓴 얼굴에 눈은 맑고 깊어져서 꼭 수도승 같았다. 헤어지려는데 선배가 말했다. “뉴코아에서 등산화를 싸게 판다는데 보러 가지 않을래?” 80% 할인이라고 적힌 지하 매대에서 선배는 푸른 신발을, 나는 붉은 신발을 샀다. 선배는 몸이 허락하는 날에는 늘 산에 갔다고 했다. 두 번쯤 동행했다. 어느 봄날,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가면서 선배가 말했다. “산은 하루도 같은 풍경이 없어. 계절의 변화는 정말 경이로워. 수리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 선배는 하루하루에 감사했다.


솔잎 

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한국에 살 때는 실감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 산은 대부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하고 온화하다. 어디나 뒷산이 (하다못해 뒷동산이라도) 있다는 것은. 교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다녔던 학교 교가는 “인왕산 넘고 넘어 들 넓은 곳에”나 “용마산 한어리에 자리를 잡고”로 시작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다닌 학교 교가도 첫소절이 “수리산의 정기로 이어온 터에”였다. (교가를 조사해보면, 모르긴 해도 산 이름으로 시작하는 것이 제일 많을 것이다.)

산은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나도 산에서 많이 놀았다. 산딸기를 따 먹고, 잠자리를 잡고, 도마뱀을 쫒아다녔다. 초등학교 첫 소풍도 ‘애기릉’으로 갔다. 산 중턱 평평한 곳에 작은 무덤이 있었다. 거기서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그 둘레에 앉아 수건돌리기를 하기도 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상하겠지만, 그때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산에 무덤은 흔했다. 이 이야기를 하니 우리 아이들은 만화 <검정고무신>을 떠올리던데, 1970년대 서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추석을 앞두고 늘 송편을 빚을 준비를 했다. 쌀가루를 익반죽해서 치대고, 깨와 콩으로 소를 만들어 놓고 우리를 부르셨다. 모여 앉아 송편을 빚을 때마다 엄마는 “이걸 잘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댄다.”고 말씀하셨다. 엄마 송편은 동글동글 매끄럽고 예뻤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어느 해엔가, 송편을 찌려는데 시장에서 솔잎 구해 오는 것을 잊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어둑한 저녁에 집을 나섰다. 한참 후에 주머니에 뾰족한 솔잎을 가득 넣고 돌아오셨다. “뒷산에 가서 따왔다. 누가 볼까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추석 전날 밤, 정직한 우리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산에서 큰 절도를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소심한 분인지는 그때 알았다.    



활터 

남편의 하이킹 부츠는 이태원에서 산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걸 신고 자주 수리산에 갔다. 집에서 나와 30분만 걸으면 깊은 산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했다. 그는 산속을 날다람쥐처럼 샅샅이 쏘다녔다. 어느 날부터인가 낡은 옷가지와 담요를 가지고 나가더니 인적이 없는 외진 곳에 활터를 만들었다. 커다란 포대에 가져간 헌옷을 채워 넣고 과녁으로 삼았다. 평소에는 군대에서 쓰는 위장용 그물을 덮어 두어서 밖에서는 잘 알아챌 수가 없었다. 활을 쏘지 않는 날은, 등산로를 벗어나 산짐승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가 친구에게 자랑했다. “어린 시절을 다시 경험하는 것 같아.” 그는 산에서 소년이 되었다. 

영국으로 오기 전에 활터를 정리했다. 큰 배낭을 짊어지고 가서 과녁을 가지고 내려왔다. 이제 산에서 활을 쏘는 일은 다시 못할 것이다. 영국에는 이런 산이 없다. 아니 세상 어디를 가도 한국의 뒷산 같은 것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산에서 만끽할 수 있었던 풍요는 한국을 떠나면서 그가 가장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이다. 지금도 그리워한다. 대신 찾은 것이 숲이다.



숲     

그와 나는 여러모로 다르다. 나는 실용적이고 그는 심미적이다. 내가 방마다 시계를 거는 동안, 그는 거울 놓을 자리를 찾는다. 나는 확 트인 넓은 공간을 좋아하는데 그는 은밀하게 숨겨진 곳을 좋아한다. 나는 들판이나 바닷가에 나가고 싶어 하고, 그는 숲에 가고 싶어 한다. 나는 바닥이 질척이고 빽빽한 나무로 어두운 숲이 무섭다. 그래서 그가 근처 ‘애보트 숲(Abbot’s Woods)’에 가자고 해도 좀처럼 따라 나서지 않았다. 지난 가을에 딱 한 번 같이 갔다가 속이 울렁이고 불안해져서 집에 갈 시간만 재촉했다. 질척한 땅에 어울리지 않는 바닥 창 얇은 스니커스를 신고 나선 내 불찰도 크다.

지난 주말, 등산화를 챙겨 신었다. Y 선배와 같이 산 그 신발이다. 텔레비전에서 오늘이 춘분이라고 북반부에 공식적으로 봄이 온 것이라고 해서, 봄을 보고 싶었다. 애보트 숲에 갔다. 그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느라 남편도 거의 한 달 만이다. 집에서는 그리 기운이 없더니, 나무들 사이에서 점점 활기가 차올랐다. “여기가 왜 그렇게 좋아?” “여긴 구석구석 같은 풍경이 하나도 없어, 재미나지. 인적이 없는 곳에는 사슴도 있어. 이런 숲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 그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밑창이 두껍고 씩씩한 신발을 갖춰 신으니 진흙에 빠지는 걱정이 사라졌다. 발 디딜 자리를 찾느라고 땅만 봤던 눈을 들어보니, 나무도 하늘도 햇살도 그림자도 보였다. 그래, 봄기운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글/ 사진, 이향규

매거진의 이전글 순수하지 않은 언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