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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y 11. 2021

걸음이 느린 AI

나는 아주 느리다. 행동과 결정도 느린 편이지만, 무엇보다 달리기가 절망적일 만큼 느리다. 아무리 사력을 다해 뛰어도 100m를 18초 안에 주파한 기억이 없다. 이런 속도로는 무엇을 훔쳐서 달아날 재간이 없기 때문에 비교적 양심적으로 살았는지도 모른다. 혹시 오래달리기는 사정이 나을지 모른다고 기대한 적도 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느린 상태로 오래 뛰니까 차이만 더 벌어질 뿐이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 내내 체육 시간을 두려워했고 체육대회를 증오했다. 나에 대해 절망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웃음을 찾아주세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참 궁금하다.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본인은 그렇게 하셨느냐고 말이다. 학창 시절 내내 체육 시간이면 다른 친구들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며 그마저도 멀찍이 달아나는 모습을 봐야 했다. 넷이 한 조일 때는 세 개의 뒤통수가, 여섯이 한 조일 때는 다섯 개의 뒤통수가 점점 작아졌다. 늘 격차가 큰 꼴찌였다. 혼자 달리기 연습을 해본 적도 있지만, 연습하는 동안에도 계속 절망감이 들어 지속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을 즐기라는 말인가. 절망을 즐긴다는 건 도대체 뭘까? 영 이상한 사람이 되라는 뜻일까?


출처: Unsplash


중학생 때였다. 체육 선생님이 선착순 달리기를 시켰다. 그날 역시 많은 뒤통수를 봐야 했다. 그러다 날 추월하려던 누군가가 내 등에 부딪혀 그만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부딪힌 친구는 고꾸라진 내 위로 쓰려졌다. 녀석의 몸이 순식간에 내 뒤통수를 눌렀고 내 얼굴은 흙바닥과 조우했다. 앞니가 얼얼했다. 교실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앞니를 흔들어보았다. 왼쪽 앞니에서 하얗고 작은 조각이 슬그머니 떨어져 나왔다. 오른쪽 앞니와 만나는 겉면이 0.1mm쯤 세로로 떨어져 앞니 사이가 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또 완전히 뚫린 게 아니라 안쪽 면 일부는 남아 있어서 어떻게 보면 잇새가 뜨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통증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가 치과에 안 가도 괜찮겠느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 했다. 보기에 조금 그랬지만, 뭐 활짝 웃지만 않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그때는 정말 조금 덜 웃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군대를 다녀와 복학할 즈음까지 그렇게 쪼개진 앞니를 달고 다녔다. 복학을 앞두고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비로소 치과에 갔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참 오래도록 온전치 못한 앞니를 달고 다니다가 비어 있는 부분을 땜질했다. 곧 이는 멀쩡해졌다. 멀쩡한 이를 달고 영화관에 출근해 첫 손님을 맞아 “3관은 오른쪽 끝에 있습니다.” 하며 활짝 웃어 보이려는데,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아, 떨어져 나간 조각과 함께 감정의 일부분도 떨어져 나갔었나 보다. 아니면 가슴속 어딘가에 깊이 처박혀버렸나? 볼펜을 생각보다 너무 오래 써서 미리 사둔 리필 심을 어디에 쑤셔 박았는지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나는 내 웃음을 찾지 못해 한참을 서성이고 헤맸다. 이는 치과에서 때웠는데, 잃어버린 함박웃음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웃음을 잃은 대신 눈물이 많아진 건 아닐까 기대해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당시 멜로영화가 많이 개봉했다. <이프 온리>, <노트북>,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등등의 영화를 영화관 알바생 찬스로 잔뜩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특정 장면이 슬프다는 게 이해는 되는데 아무리 쥐어짜도 눈물이 나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운 게 언제지? 와, 생각해보니까 대학 새내기 때 첫사랑이 떠나던 날도 마음은 괴로웠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었네! 감정 자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 거다. 웃음을 다는 날개가 작아지면 우리 몸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슬픔의 날개도 작게 만드나 보다…. 달리기가 느린 탓에 AI가 되었다니 너무 심하잖아? 연기를 배워서 다행이다. 진로를 잘못 정했으면 평생 AI로 살 뻔했다. 운동 다음에 포기한 게 수학인데 동작도 느리고 계산도 못하는 AI라니, 정말 인생 골로 갈 뻔했다.


연기자의 딜레마


연기를 하다 보면 감정이 도저히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아니, 거의 매번 감정이 잡히지 않는다.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감정의 뒤통수만 보게 된다. 사력을 다해 뛰어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럼 어째야 할까? 

원래 감정은 잡는 게 아니다. 그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공기를 움켜쥐겠다는 꼴이다. 우리는 기쁘니까 웃고 괴로우니까 찡그린다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엄마, 아빠 얼굴을 보며 따라 웃고 미간을 좁혀보고 눈을 흘기기도 하며 감정을 배웠다. 그래서 그냥 그런 것처럼 표정을 짓고 행동을 하면, 감정이란 녀석은 알아서 내게 고개를 돌리고 따라오기 시작한다. 활짝 웃지 않으니 점점 그 감정을 잊게 되었듯, 되찾는 방법은 별로 기쁘지 않아도 대단히 행복하지 않아도 당나귀처럼 앞니를 내밀고 시시때때로 웃는 거다. 내가 그랬다. 지금은 녹음하는 중에도 잘못 웃음이 빵 터지면 멈추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출처: Unspla

이런 식이면 눈물도 간단히 되찾을 수 있다. 우선 한곳을 응시한다. 벽에 점을 찍어도 좋고, 책상 위에 작은 물체를 놓아도 된다. 목표물을 바라보고 최대한 불편하게 숨을 쉰다.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시고,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앓듯이 숨을 내뱉는다. 그러면서 절대 눈을 깜빡이지 말자. 점점 눈이 아파질 거다. 눈은 거세게 저항하며 감기려 할 것이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눈동자를 덮는 듯 뻑뻑해도 굴복하지 말자. 어느샌가 앓는 소리가 한결 자연스러워진다. 마음속 깊이 감춰두었던 괴로운 일이나 모욕적인 일화가 머리를 스쳐갈 수도 있다. 그때 한 번 더 눈을 부릅뜨자. 아마 곧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더 간단하게는 손가락을 브이 자로 만들어 눈을 쿡 찌르는 방법도 있으나, 눈물은 되찾고 눈을 잃을 수 있어 권하지 않는다). 이런 방법에서 얼마만큼 깊은 진심을 끌어내는지는 각자의 몫일 테지만.


물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제3부 비극 속에서의 낙관 중에서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의 진짜 뜻은 이런 게 아닐까. 즐기겠다고 마음먹기 전에 충분히 고민한다.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는지 한 번 더 묻는다. 피할 수 없다고 섣불리 결론지었다가 불필요한 대가를 치를지 모르니까. 그래도 끝내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여기서 ‘즐긴다’는 말의 뜻이 향락이나 만끽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시련을 파고들어 무언가를 배우고 그 안에서 의미를 캐내는 지난한 과정을 ‘즐거이’, 최대한 그렇게 겪어보려 하자는 말일 터다.

요즘 AI에 쓰이는 음성합성 녹음을 하고 있다. AI도 언젠가 감정의 작동법을 알게 될까? 위조된 상냥함이 아닌 진심 어린 목소리를 내는 날이 올까? 이런 작업을 할 때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이다. 아마 그런 날이 오면 성우들에게 어마어마한 시련이 닥치겠지. 에이, 모르겠다. 지금 즐기자. 피할 수 있을 때 즐기자.


글/ 심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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