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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화자 May 01. 2021

글 쓰는 할머니의 오늘 이야기 34

고향-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고향 -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신 화 자


모란꽃 지고 작약 꽃이 피었는데

꽃을 반길 새도 없이 꽃잎은 빗속에서 시들고 있네.

 모란의 꽃잎은 붉은 치마, 꽃술은 노랑 저고리.

횃댓보에 수놓고 앞마당 뒤뜰이 환하던 모란 작약꽃.

화사한 젊음 같은 5월의 한 나절이 꽃 속에서 웃고 있네.

비에 젖고 있네.

돌아갈 수 없는 내 고향

그 시절이 꽃 속에 있네.

돌아갈 수 없는 내 고향 그 시절이

꽃 속에서 피고 있네. 비에 젖고 있네.

  

작약의 분홍빛 꽃잎이 수줍은 듯 웃고 있다. 작약과 옥잠화 꽃이 피는 계절이다. 꽃 냄새를 맡으면 꽃향기 피어나던 나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춘천시 요선동 49번지는 나의 고향이다. 개인정보를 입력할 때 제일 첫머리에 반드시 써넣어야 했던 중요한 항목은 본적지였다. 나의 인생 전반부 본적지는 춘천시 요선동 49번지였다.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신 아버지의 9남매 7형 제분들께서 대 가족을 이루고 추억의 역사를 만들던 ‘큰집’ 자리다. 나의 유년시절 기억은 큰집에 많이 머물러 남아있다. 아마도 큰 아버지께서 늦게 자녀를 두셨고 아버지의 이른 상처(喪妻)로 해서 할머니 곁에서 지낸 날들이 많았던 것이리라. 집안의 구조라든가, 벽에 걸렸던 그림들도 소상하게 생각이 난다. 대문을 열 때 삐거덕거리던 나무 대문과 담쟁이덩굴, 바깥채와 안채 사이의 중대 문과 사랑채, 모란과 작약과 옥잠화, 국화들이 철마다 가득하던 뜨락과 뒤꼍의 대추나무가 있는 뒤 울안을 한 바퀴 돌면 장독대가 있고 어둡고 널찍한 광 방, 그리고 부엌은 넓고 늘 어두웠다. 지붕에서 흘러내리던 낙숫물이 크고 작은 물방울을 만들며 흘러가던 모양까지도 그림책처럼 펼쳐진다.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바느질 그릇 옆에서, 화로 곁에서, 빗질을 하시던 할머니의 빗접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일도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어 동백기름을 발라 긴 머리를 땋아서 은비녀를 꽂아 쪽을 찌셨지. 고향 가는 길은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다. 눈을 감으면 꿈속에서 만나는 길이다. 그림책처럼 선명하게 펼쳐지는 선명한 추억이다. 유년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다. 모란과 작약 꽃들은 내 유년의 그리운 시절로 날 데려간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립다.   6.25 이전에는 도청 앞에 뚝 떨어지듯 내려앉은 공터가 있었고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다. 지금도 그때도 봉의산에는 진달래가 많았다. 진달래 피는 봄철에 봉의산에는 문둥이가 있어서 아이들을 잡아간다고 어른들은 겁을 주었다.

  도청으로 올라가는 길옆에 프라타나스 가로수는 1960년대 초에 심은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모수물 고개를 넘어서 도청 길을 오르내리며 출퇴근을 했다. 큰집은 오다가다 아무 때 들어가도 편안했다. 집안의 기둥이며 대들보가 든든했던 시절이다. 누구네 집이라고 하면 춘천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바닥은 좁고 빤하던 시절이다. 지금은 주인이 바뀐 요선동 49번지, 그 자리에는 우여곡절 사연을 가지고 높고 큰 빌딩이 우뚝 솟아 있다. 세월은 많이도 흘러갔다. 강산도 변하고 물정도 변하고 사람도 시속도 모든 게 변했다. 어른들께서는 돌아가셨고 사촌들도 만나기 어렵다. 다만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큰집에 대한 추억만 선명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소양로 280번지는 나의 십 대와 이십 대를 키워 준 마당 너른 집이다. 지금도 꿈을 꾸면 그 마당 너른 집꿈을 꾼다. 봉의산 아래 양지바른 집에서 동생과 나는 석사동까지 멀고 먼 등하교 길을 걸어 다녔다. 무슨 꿈을 꾸면서 어떻게 사춘기를 보냈는지, 6.25 전쟁의 뒤끝에 겨울은 더 추웠고 우울한 사춘기 시절이기도 했다.

 고향은 과거의 추억이다. 고향 가는 길은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다. 꿈속에서 만나는 그리움이다. 요선동에도 산천리 옛날 종축장 자리에도 소양로 2가 마당 너른 집에도 퇴계동에도 내 고향 그 시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운 사람들은 떠났고 옛집은 헐렸다. 길은 넓어졌고 언덕과 고개는 평평해지고 개울은 다리가 놓여 자동차가 줄을 지어 달린다.

  햇볕 따사롭던 그곳이 어디였던가. 어느 날 문득 고향집이 가보고 싶었다. 도청 고개를 오르고 봉의산을 오른쪽으로 두고 돌아가면 모수 물 고개다. 고개들은 밋밋하게 낮아졌다. 그래도 옛 모습은 조금 남아 있다. 오른쪽으로 왕모래가 쏟아져 내리던 산자락을 우리는 도토리산이라고 불렀다. 도토리나무들이 깎아지른 듯 가파른 모래산 위에 비스듬하게 서 있었고 굵은 왕모래가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후드득후드득 도토리들이 떨어졌다. 바람이 불면 봉의산 참나무들은 도토리들을 마구 떨어트렸다. 그 옛날 왕 모래가 흘러내리던 봉의산 자락에는 잘 쌓은 축대 위에 번듯한 집들이 빼곡하다. 시야가 훤히 트인 이 길은 서쪽으로 소양강 물과 서면이 훤하게 바라보인다. 강바람이 마주치는 겨울에는 찬 바람이 매섭게 옷 속으로 파고들던 길이다. 마당 너른 집은 도시계획이 시행되면서 마당 한가운데로 길이 나고 한쪽 귀퉁이만 남았다.  수 없이 많은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던 수십 군의 벌통들이며 대륜국화와 부용과 양귀비꽃이 너른 마당 가득하던 환상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다. 귀퉁이만 남은 좁은 터에 이층 집을 짓고 낯 모르는 이가 구멍가게를 보고 있다. 소양로 천주교회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내가 어릴 적의 성당은 둥근 지붕이 크고 웅장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작아진 듯 아담하고 예쁜 건물이다. 한류스타 배용준이 출연한 영화를 찍은 곳이 바로 이웃에 있다. 관광객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바로 그 집이다.  정들었던 옛집은 온 데 간 데 없고 사람들은 모두 떠나 버렸다. 아버지가 마당 너른 집을 처분하고 고향을 떠나신 일도 오래되었고 고향을 그리워하시면서 세상을 뜨신 일도 또 여러 해가 자났다. 형제들은 모두 서울과 수도권 신도시와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고 있다. 날마다 봉의산을 바라보고 소양강 강바람을 쏘이고 고향의 냄새에 흠뻑 취하듯 살면서도 난 무엇이 궁금했을까. 고향을, 내가 살던 곳을 찾아보고 싶은 수구초심이었을까. 나이를 먹으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랫말이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옛날에 내가 살던 집 꿈을 꾼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회귀본능이다. 퇴계동 66번지는 내 인생 후반부의 본적지다. 내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운 것처럼 내 아이들도 어느새 성년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운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변두리였던 퇴계동이 변했다. 논밭이 있었던 자리가 어디쯤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퇴계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 아이들도 어린 시절의 꿈을 꿀 것이다. 효자동 마당 너른 집 시절도 그리울 것이다. 젊고 화려한 시절에는 잊고 지내도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한다.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한다. 고향은 돌아갈 수 없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손자들은 먼 훗날 무슨 꿈을 꿀까. 고향을 그리워하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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