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을 하는 언어 생활자
“내가 있었던 장소, 내가 실제로 있었던 곳과 내가 기억하는 장소로만 돌아갈 수 있어.”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 팀은 성인이 된 날 아버지로부터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물려받은 가문의 비밀을 듣게 된다. 빨간색 웨딩드레스와 비 오는 날의 유쾌한 결혼식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 영화는 기존의 시간 여행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공식들을 비교적 정직하게 지켜내는데, ‘하나, 간절히 바꾸고 싶은 인생의 무언가, 둘, 시간 여행의 비밀을 아는 공범 및 조력자, 셋, 시간의 순리를 거스른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시간 여행의 능력을 물려받은 비밀스러운 가문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도 한번쯤은 ‘시곗바늘을 돌려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가볼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그러한 가정은 언제고 언어를 통해서 구체화될 수 있는데, 한국어에서 가정을 담아내는 말그릇은 주로 연결어미가 담당하게 된다. “내가 엄마가 된다면,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 이 문법 표현들은 현재 말하고 있는 발화 시로부터 우리가 인식하는 시점을 멀리에 둠으로써 모종의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과거로도, 미래로도 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가정의 연결어미들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 여행을 해봄 직하게 만드는 가문의 비밀인 셈이다.
그중에서도 ‘-었-’이 결합한 ‘-었다면’과 ‘-었더-’가 결합한 ‘-었더라면’은 ‘현재 사실에 반대되는 가정’을 만들어내는 연결어미이다. 즉, 이미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현재의 사실과 반대되는 과거를 가정해보게끔 하는 문법 표현인 것이다. ‘그때 널 혼자 두지 않았더라면, 너는 지금쯤 행복한 아이로 자랐을 텐데.’ 미안이라는 말이 차마 목구멍을 밖으로 나오지 못할 때에도, ‘-었다면’과 ‘-었더라면’은 우리를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려, 사무치는 마음을 넘치지 않게 담아낸다. ‘-었다면’과 ‘-었더라면’을 통해 우리는 뼈아픈 후회가 있는 오늘을 벗어나 과거로, 오늘과는 다른 어제로 되돌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과 함께, 물리적인 거리는 두되, 마음만큼은 가까이 있자는 구호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거리두기에 대한 이와 같은 우려는 아마도 밀착해 있던 익숙한 삶들이 멀어져가는 것에서 나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은 멀리 있어야 보이는 것들도 있다. Stay at home. 모두가 집으로 들어가버린 텅 빈 거리 위에서 어쩌면 집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었던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되었고, Stay safe. 안전을 위한 의료 제도 및 서비스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도, Save lives. 다른 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익숙한 세계 안에서 지낼 때에는 모두가 볼 수 없었던 것들인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때로는 아무리 돌이키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과오도, 힘껏 나아져보려 해도 좀처럼 아물어지지 않는 상처도,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 정직하게 기록이 되기 마련이다. 쉼 없이 달려온 우리네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은 어쩌면 오늘의 삶으로부터 잠시 멀어져 보는 시간의 거리두기인지도 모르겠다.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을 구태여 이루려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하여 조금은 끄덕일 수 있도록. 영화 속 시간 여행자들이 어떠한 깨달음과 함께 종국에는 모두 시간 여행을 멈추는 결정을 내리며 현실로 돌아오듯, 우리도 다시 오늘을 다독이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언어를 통한 시간의 거리두기를 통해 더듬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새 봄이 왔는지 경주 고분 위에는 푸른빛이 자라고 있다. ‘-었다면’과 ‘-었더라면’의 숨겨진 비밀 중 하나는, 이 문법 표현들이 ‘후회’에 쓰이는 동시에 ‘깊은 안도’에도 쓰인다는 사실이다.
- 그래도 네가 너인 게 아니었다면
그건 정말 서운할 뻔했어.
언 틈새에 틔워 낸 푸른빛처럼,
이 말이 당신의 마음에 닿길 바란다.
글/ 사진제공. 김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