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흑요석
일러스트레이터 흑요석은 2010년 <한복 여인 시리즈>를 발표한 이후, 한복과 동양화적 기법을 다양한 이야기와 캐릭터, 소재에 접목해 재해석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 영화 <말레피센트2>의 주연 안젤리나 졸리가 한복을 입은 그림은 한국 전통복식 요소와 캐릭터의 개성을 함께 살려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예뻐서 그리게 됐고, 계속 보다 보니 한복이 좋아졌다는, ‘한복 덕후’. 한복만의 미학을 애틋해하는 그의 고민은 전통과 문화에 대한 고찰에 가닿고, 그가 한복에 품은 사랑만큼 그림의 농담(濃淡)은 깊어진다. 익숙한 장면에 색다른 매력을 부여하고, 상상을 뚜렷하게 하는 작업까지. 방대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입었을 이 옷을 통해, 흑요석은 가열 찬 호기심과 시도로 끝없는 모험을 하는 중이다.
오랜 기간 한복을 주제로 다양한 디자인을 펼쳐오고 계시는데, 작업 초반과 현재, 작업 방식이나 부담감 등의 측면에서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제가 한복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가 ‘예뻐서’였거든요. 한동안 그림을 안 그리다가, 다시 시작할 때 발견한 게 한복이었어요. 작업 초반엔 손이 굳은 걸 풀면서, 게임 업계에서 그림 그리는 친구를 어깨너머로 보고 독학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지금과는 정말 달랐죠. 동양화적인 기법도 사용하지 않았고요. 한복을 알리기 위해 그리기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언젠가 외국 교포 분께 이런 얘길 들었어요. 본인은 어릴 때, 동화 속 공주 놀이를 하면 ‘난 노란색(황인종)이니까 공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셨대요. 그런데 제 그림을 보고, 태어날 아이에겐 ‘너도 동화 속 공주가 되어볼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하셨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최근 작업하신 영화 <크루엘라> 아트포스터의 경우, 배우들의 표정과 자세가 한복 특유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집니다. 이번 작업에서 중점을 두신 지점이 궁금합니다.
역시 ‘한복을 보고도 원작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가.’인데요. 기존 <달마시안> 속의 크루엘라(엠마 스톤)가 영화 속으로 오면서 인물의 여러 부분이 달라졌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썼어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라그나로크>의 경우 캐릭터의 특성 등을 많은 이들이 아는 상태였는데, 크루엘라가 걸친 퍼와 들고 있는 담뱃대는 원작에선 나타나진 않았으니까요. 이 인물이 크루엘라라는 걸 어떻게 보여줄지가 가장 고민이었어요. 영화 트레일러 속 장면에서 힌트를 얻어, 크루엘라가 입은 빨간 드레스 대신 치마저고리를 입혔어요. 남작부인(엠마 톰슨)의 그림에선 브라운과 골드 계열 색을 사용해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배우의 표정을 살리고자 했습니다.
<크루엘라> 아트포스터를 보면, 한복이 인물에게 딱 달라붙잖아요. 18세기에 유행한 ‘하후상박’ 형태인데요. 민간에서 선도해 상류층에까지 확산된 스타일이에요. 크루엘라가 영화에서 틀을 깨는, 획기적인 캐릭터이기에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요. 남작부인 옷은 사대부층의 귀족적인 면모를 강조했고요. 궁에 들어갈 때 입었던 당의 위의 삼작노리개(세 개의 노리개가 한 벌이 되게 만든 노리개)도 지금으로 치면 세단 한 대 가격일 정도로 부의 상징이었어요. 권세가 높은 고관대작 스타일의 남작부인과, 민간에서부터 시작된 스타일의 크루엘라는 각각 매우 상반되죠.
개인전 ‘한복을 입은 동화’에선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작가님만의 스타일로 보여주고 계시지요. 동화 속 장면을 선정하실 때의 기준이 있을까요.
장면이 한복과 잘 어우러지는지, 또 한눈에 원작을 파악하는 게 가능한지를 기준으로 선정하고 있어요. 외국 동화인 경우에도 한복뿐 아니라 동양화적 요소를 가미하면 전래 동화같이 느껴져서 더 재미있어요. 전 동서양을 안 가리고 전통 의상을 좋아하거든요. ‘빅토리아 시대’ 옷도요.(웃음) 그래서인지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 어떤 나라 전통 의상이 ‘찰떡’일지 상상이 가요. <자정의 신데렐라>를 그릴 때도 그랬어요. 신데렐라를 생각할 때, 파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떠오르곤 하잖아요. 물색 당의에 파란 치마를 입고, 그 안에 겹이 진 밑단이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치마를 거머쥐고 뛰는 신데렐라의 모습과 잘 어울리니까요.
작품 활동을 하며 작가님께서 느끼신 한복만의 매력과 특징이 궁금합니다.
드라마 <황진이>나 스메라기 나츠키의 만화 <이조 암행기> 같은 작품 속 한복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책도 모으고, 한국 전통 문화를 소개하는 좋은 사이트가 많아서 공부도 했어요. 어떤 대상이든 시간을 들이고 신경 쓰면, 그게 좋아지지 않나요? 예뻐해준 시간이 쌓이니까 한복이 더 좋아지더라고요. 저에게 한복은 무궁무진해요. 한복을 잘 보면, 저고리의 고름 두께와 길이에 따라 의상의 느낌이 달라져요. 고름이 하의 쪽으로 길면, 키가 커 보여요. 두툼하고 짧게 나비 리본처럼 매듭지을 수도 있고요. 한복의 그런 매력이 좋아요. 사람의 모습도 완벽한 대칭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고리도 입으면 더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같아요. 저고리엔 한복의 재미가 가득해요.
한복 외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한국 전통 디자인이나 물건이 있나요.
한복과 더불어 이야기와 어울리는 소품, 수묵화에 등장할 법한 나뭇가지 등을 그리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한옥의 단청이나 토종 꽃 등에 관심이 생겼어요.
동물이나 <겨울왕국> 캐릭터 작품의 경우 아기자기함이 배가되고, <크루엘라> 아트포스터에선 더 진한 선이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작품마다 어떻게 기법을 달리하시나요.
동화 속 동물의 경우 아무래도 고운 느낌으로 그리는 편이에요. 콜라보 작품은 주로 SNS 홍보용이잖아요. 수많은 네모진 썸네일 사이에서 사람들의 눈에 들어야 하기에 선을 진하게 쓰게 돼요. 동양화적인 먹 느낌을 주려고도 하고요. <크루엘라>는 캐릭터의 강렬함을 살리기 위해 선을 굵게 썼고요. 붉은 옷을 입은 모습과도 잘 어울려요.
한복은 워낙 다양한 색감을 품은 복식인데, 색채 활용에 있어 중점을 두는 부분도 궁금합니다.
한복의 색채엔 크게 구애받지 않는 편이에요. 컬러도 캐릭터를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요소거든요. 처음엔 많은 작가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앨리스를 다양한 컬러로 그렸는데요. 디즈니의 만화 이후엔 삽화가들이 모두 파란 치마와 하얀 앞치마, 노란 머리의 앨리스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에게 그게 앨리스로 인식되니까요. 저는 한국 전통 복식에, 앨리스 하면 떠오르는 옷의 색채를 가져왔고요. 캐릭터를 떠올릴 때 생각하는 컬러를 사용하고 있어요.
작가님이 그리신 <백설 공주> 속 왕비가 사과 대신 석류를 들고 있거나, 작은 보료 위에 누워있는 엄지공주의 모습에서는 작가님만의 시각이 느껴집니다.
제가 재미있어야 다른 사람도 재밌게 볼 거라 생각하거든요. 패러디를 전부터 좋아했고요. 왕비를 제 스타일로 그렸을 때, 사과를 들고 있는 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손에 석류를 쥐어줬어요. 엄지공주의 경우 책가도(책을 비롯한 도자기, 문방구, 향로 등이 책가 안에 놓인 모습을 그린 그림)를 보고 영감을 많이 받았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온라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었는데요. 디지털 페인팅 작업으로서의 한복 일러스트레이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기 전엔 그림이 ‘하나만’ 있었잖아요. 복제본이 있다 해도, 소장하는 사람들은 한정적이고요. 개인이 소장하면 다른 사람은 못 보는, 그런 때는 지난 거죠. SNS 속 작품들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보고요. 이런 시대에 한복을 그린다는 게 감사하고, 재미있어요. 최근 생각하는 화두가 ‘뿌리의 재발견’인데요. 저 역시 어릴 때, 한국적인 것이 촌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 한복을 좋아하게 되면서, 전통에 대해 고찰하게 된 것 같아요.
더 도전하고 싶은 한국 전통 복식 스타일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현재로서는 전통 남자 복식에 대한 관심이 커요. 외출이 잦았던 남성들의 복식은 한쪽 소매만 열 수 있는 구조 등, 다소 복잡한 구성이 많아요.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우리의 한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도 궁금하고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몸이 모자라요.(웃음)
-참고한 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