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분명 청포도 맛이었다. “청포도 맛이 난다고? 신기하네….”라고 은송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응, 정말 청포도 맛이 나. 연두색의 말캉한 포도 알맹이를 삼키고, 씨를 씹었을 때 느껴지는 그 달콤 쌉싸름한 맛있잖아.” 나로선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술의 맛과 향이었다. 확실한 사실은 그 술에는 인공감미료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술은 은송이 직접 빚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 술에서 청포도 맛이 느껴진 것일까?
은송은 재주가 많다. 농부 시장에서 5년간 일한 덕분에 전통주를 비롯해 다양한 식재료를 잘 이해하고 있다. 요가나 달리기처럼 몸 쓰는 일도 열심히 한다. ‘대한민국 100대 명반’을 다 들어보았을 정도로 1980~90년대 음악도 좋아한다. 요즘은 식물에 빠져 있는 듯하다. 다만 그게 전문가라고 할 만큼은 아니어서 스스로 ‘다재무능’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하는데,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 아닐까. 나는 종종 생기를 느끼고 싶을 때 은송의 집을 찾고, 그곳에 가면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인 사치스러운 은송이 있다.
해가 잘 드는 네 집은 참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어.
영국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런던의 채광 좋은 집들을 보면서 결심했어. 다음엔 무조건 햇빛이 잘 드는 집으로 이사 가야겠다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이사 준비를 시작했지. 반지하에서 3년가량 살았으니까 때마침 이사할 때도 됐었고. 주위 친구들도 하나둘 전셋집으로 옮기기 시작하던 시기였어.
반지하가 꼭 나쁜 건 아니잖아.
맞아, 3년 정도 살면서 꽤 만족스러웠어. 경사에 있어서 1층이나 다름없었거든. 하지만 지대가 낮으니까 해가 일정 시간에만 들었어. 그리고 부엌 외에 거실이 따로 없어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지. 방에선 잠만 자고, 거실에선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는 게 전부였거든.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거실을 꼭 갖고 싶었어. ‘햇빛과 거실’ 그 두 가지만 보고 이사를 결심했어.
햇빛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어쩌면 네가 나무 같은 사람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동네 이름도 목동이잖아. 한적한 주택가라서 그런지 젊은이들이 많은 대학가와 사뭇 다른 편안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이 동네가 왠지 마음에 들어. 마포구에 살고 싶지만 목동은 같은 돈으로 조금 더 넓은 집을 구할 수 있었어. 전에 살던 집 코앞으로 이사 온 걸 보면 이 동네에 정이 많이 들었나 봐. 흔히 목동이라고 하면 아파트 단지와 사교육 등을 떠올리지만 중심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전통시장도 많고 정감 있는 동네야.
미니멀 인테리어가 트렌드이기도 하고, 1인 가구가 넓은 집을 가질 생각을 잘 안 하는데, 넓은 공간을 갖고 싶어 하는 네 욕구가 색다르게 느껴져.
워낙 집에서 노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봐. 집은 나만의 공간이 아니라 늘 누군가와 함께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해왔어. 집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먹고, 책도 읽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나라에 카페가 많은 게 개인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잖아. 보통 바깥 공간에서 하는 대부분의 일을 나는 집에서 하는 것 같아. 노래방에 가는 대신 집에서 노래 틀어놓고 춤추는 것처럼 말이야.
전에 살던 집의 방이 세 개였지. 떠올려보니 그 집에 얽힌 추억이 참 많아. 네가 연 파티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잖아. 또 네가 해준 맛있는 요리들도 많이 먹었지.
처음엔 부모님도 혼자 사는데 왜 방이 세 개나 필요하냐고 물어봤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처음 자취하면서 스리 룸이라니 배포가 컸던 것 같아.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친구랑 같이 살 수도 있다고 얘기해야만 했지. 스리 룸인 덕분에 친구들과 룸 셰어도 하고, 그 집에 좋은 추억이 많아. 규환이 네 말대로 친구들을 불러 다양한 모임이나 파티를 열기도 했고.
이 집에 이사 오고 나서 가장 많이 변한 건 뭐야?
반지하에 살 때는 밤이 아주 길었는데, 지금은 아침이 길게 느껴져. 전에는 아침과 밤이 구분이 잘 안 됐어. 지금처럼 드라마틱하게 ‘아침이네!’ 하고 떠오르는 해를 느낄 수 없었으니까. 집의 상태에 따라서 사람의 생활 리듬도 많이 바뀌더라고. 집 덕분에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어. 그런데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밤이잖아. 그래서 햇빛을 누리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게 돼. 출근하기 전에 아침을 먹고,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그러다 보니 생활 시간대가 저녁에서 아침으로 바뀐 게 큰 변화야.
그래서 이렇게 거실에 식물도 많아졌구나. 요즘 식물을 돌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궁금해.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기 쉽지 않잖아. 식물을 천천히 관찰하면 아무것도 안 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 앞면, 뒷면, 옆면 구석구석 바라보고, 마른 잎을 다듬고, 그러다 멍도 좀 때리고. 특히 새잎이 나는 모습을 보면 참 예뻐. 주는 거라곤 물밖에 없는데 말랑말랑한 새잎을 계속 틔우는 그 모습이. 그리고 식물에 물 줄 때 화장실에 다 데리고 가서 샤워시키곤 하는데, 확실히 생명을 보살피는 느낌이 들어.
너는 뜨개질도 하고, 요리도 하고, 요즘은 전통주 빚는 재미에 빠졌잖아. 손재주가 많은 것도 많은 거지만,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아.
의식주를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 도시에선 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원래는 직접 하는 일이잖아. 집도, 옷도, 술도 직접 만들던 인간적인 감각을 도시에 살면서도 이어가고 싶은 것 같아. 어느 날 갑자기 재난이 닥쳐서 대량생산 기술을 가동할 수 없을 때를 떠올리며 필수적인 1차 생산 활동을 배워놓고 싶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손으로 하자’는 마인드야.
우리는 학교 선후배 사이지만, 나는 졸업했고 너는 자퇴했잖아. 네가 1학년 때 나는 4학년이었는데 둘 다 수업엔 별로 관심이 없었어.
빨리 돈을 벌어 독립하고 싶었어. 일을 배울 수 있는 현장으로 진출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대학은 공부하는 곳이니까.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대신 홈스쿨링을 했는데, 그때 입시 공부 대신 스스로 다양한 공부를 많이 했다고 생각해. 세상엔 배울 게 참 많으니까.
잠시 한 대학교 생활을 떠올려보면 어땠어?
무척 바빴는데 공부 빼고 다 했던 것 같아.(웃음) 동아리 세 곳에 들어 활동하고 연애도 하고 술도 매일 마셨지. 가입한 동아리는 풍물패, 옥상 텃밭 가꾸기, 학보사였고. 이것저것 하느라 바빠서 정작 수업 과제를 거의 못 했어. 그렇게 1년간 대학 생활을 해보니까 이 정도면 됐다 싶더라고. 당시에는 일하는 내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어.
이제는 백수가 됐는데 기분이 어때?
회사를 어떻게 5년이나 다녔나 싶어. 아직은 근처에서 떠돌고 있는 느낌이야.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매너리즘에 빠졌기 때문인데, 내가 진정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하는 걸 미루며 살았어. 밥줄을 끊어놓으면 본질적인 고민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해서. 막상 백수가 되니까 너무 자유롭고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여. 요즘도 날씨도 참 좋잖아. 앞으로 뭐 먹고 살지 다시 고민하려고 해. 올해만큼은 나한테 시간을 주고 싶어. 천천히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네 생의 모토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잖아.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을 떠올리면 그것들이 주는 정서가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 기분이 좋듯이. 좋아하는 걸 스스로 깨달을 때 기분이 좋아져. 그럼, 단순하게 ‘좋아하는 것이 많아지면 더 좋지 않을까?’,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좋아하는 걸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 지금의 행복을 미루고 싶지 않아.
자신의 집을 좋아하는 걸로 가득 채우는 게 진정한 사치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너는 사치스러운 사람 같아.
돈을 쓰더라도 좋아하는 것들에 더 쓰게 돼. 음식 배달이나 물건 택배를 잘 안 시켜. 옷이나 가구도 중고를 좋아하고. 주위에서도 많이 얻다 보니 큰 물건을 내 돈 주고 살 일이 없었어. 이것저것 물건이 많은 집치고 생각보다는 돈을 많이 안 쓴 편인데, 이제는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으로 하나씩 바꿔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좋아하는 것들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유연하게 살기 위한 너의 힘 빼기 기술은 뭐야?
나는 조급하면 무언가를 하는 편이어서 몸의 힘을 빼는 게 좋아. 요즘 매일 요가를 하는데 몸의 힘이 다 빠져서 가만히 있어도 좋아. 그중에서도 물구나무서기에 도전하고 있는데, 혼자서 하고 싶은데 못 하거든. 그런데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서 못 하는 거예요.”라고 하셨어. 사실 알고 보면 되게 쉬운 건데, 나중에 하게 되면 어이없을 거라고. 실제로 몸의 온갖 근육을 다 쓰니까 ‘어떻게 여기가 아프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몸 구석구석 한 번씩 다 아팠어. 내 몸에 그동안 몰랐던 근육들이 많이 붙어 있다는 발견의 연속이야.
30대가 된 너는 어떤 모습일까?
나 혼자 행복하고 나 혼자 즐겁기보다 친구들과 함께 즐기고 싶어. 좋아하는 일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거지.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기보다는 야금야금 내 주위의 세계를 교차시키면서. 세상엔 매력적인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 우린 아직 젊으니까 나중에 다 같이 잘 되는 상상을 해. 빨리 30대가 되고 싶어.
마지막으로, 너를 술에 비유해줘.
산미가 약간 느껴지는 약주랄까. 찐득하고 농익은, 오래 숙성된 맛이 느껴지는. 가장 좋아하는 술은 ‘장성만리’라는 술인데, 과일 향 같은 산미가 좀 있어. 단맛만 있으면 또 질리잖아. 음식에도 산미가 더해지면 더 맛있게 느껴지듯 입맛을 돌게 하는 적당한 신맛이 느껴지는 술. 도수는 18도 정도로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묵직한 한 술이라고 해둘게.
글/ 정규환, 사진/ 이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