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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n 10. 2021

사소하게 연연하는_어둡고 잔인한 현실 너머

추리소설 '스완'과 영화 '죄 많은 소녀'

일본 사이타마현 고나가와시, 조용한 베드타운인 이 도시에서 휴일에 시민들이 갈 만한 유일한 장소는 저수지 옆에 길게 자리한 3층짜리 대형 쇼핑몰, 고나가와 시티 가든 스완뿐이다. 4월의 어느 봄날 일요일, 세 명의 남자가 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다. 자신들을 각각 구스, 반, 산트라고 부르는 세 명의 남자는 평화로운 이곳에서 무차별 총격을 시작한다. 스물한 명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참사였다. 재일교포 3세인 오승호(일본명 고 가쓰히로) 작가의 <스완>(이연승 옮김, 블루홀식스 출간)의 이야기는 비극이 일어난 지 6개월 지난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범인들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구스 반 산트 감독이 2003년에 발표한 영화 <엘리펀트>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계획을 구상했다. 2003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엘리펀트>는 1999년에 일어난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소설 내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총기 난사 사건이 또 다른 참사를 낳았다는 면에서 비극의 연속성을 감지할 수 있다. 소설 외적인 관점에서는 <엘리펀트>라는 걸작 사회 고발 영화가 <스완>처럼 깊이 있는 사회성 짙은 미스터리 소설을 낳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소설 안으로 돌아가보면, 이제 관점은 가타오카 이즈미라는 여고생에게로 넘어가 있다. 이즈미는 스완 총기 난사 사건의 생존자다. 그리고 생존자라는 축복받은 입장에서 테러의 방관자 혹은 동조자로 몰리면서 비난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즈미는 어떤 기이한 모임에 초대받는다. 참석자 다섯 명은 신원을 감추고 있지만 모두 스완 총기 난사 사건 관련자다. 이들을 초대해 ‘다과회’를 베푸는 사람은 스완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인 요시무라 기쿠노라는 노부인 유족의 대리인인 변호사다. 변호사는 참석자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고 싶다는 유족의 뜻을 전한다. 그리고 모든 참석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을 서술한다. 어떤 이는 생략된 진실을, 어떤 이는 생략된 거짓을 말한다.      


<죄 많은 소녀>와 <스완>의 다른 선택

소설은 잔혹한 스릴러인가 싶은 도입부를 지나서 사회적 심리 소설의 단계에 접어든다. 이즈미는 발레리나를 꿈꾸는 소녀다. 학교에서 발레 공연의 역할을 두고 라이벌 관계이던 후루타치 고즈에도 그날 스완에 있었다. 발레를 빼면 눈에 띄는 점이 없는 이즈미에 비해, 고즈에는 이즈미의 표현대로라면 얼굴 점수 A 학점에 집안도 부유한 소녀다. 이즈미만 무사하게 돌아오자 학교,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이즈미와 고즈에의 관계에 대해서 다양한 말이 나돌기 시작한다. 타인의 비극은 사람들이 쑥덕공론하기에 좋은 소재다. 대중은 늘 비판할 누군가를 원한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싶어 한다. 


이 지점에서는 소설 <스완>과 2018년 김의석 감독의 영화 <죄 많은 소녀>를 겹쳐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여빈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 독립영화는 동급생의 실종, 사망 이후에 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몰리는 소녀 ‘영희’의 이야기다. 공부 잘하고 집안도 평안한 ‘경민’이 투신했다고 알려지자, 사람들은 영희가 경민의 자살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같은 반 친구도, 선생님도, 형사도, 경민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궁지에 몰린 영희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시도한다.

영화 <죄 많은 소녀> 포스터


<스완>에서 일어나는 추리 과정, 그날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모임은 <죄 많은 소녀>보다는 좀 더 장르적인 해결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즈미는 사람들의 의심과 선정적 관심에 무심하게 대응하려고 애쓰지만 상황은 어려워지기만 한다. 작가는 독자들에게도 진실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날 자신이 살기 위해서 이즈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또 고즈에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런 사건에서 가해자를 빼고 주변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우리 현실의 사건들도 한둘 떠오른다. 확신 없는 사건에서도 대중은 비난할 권리를 가지고 누군가를 심판한다.


<스완>의 결말은 <죄 많은 소녀>와 약간 다르게, 그리고 현실과 다르게 서정적이다. 이에 아쉬움을 표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하던 소설이 낭만적인 타협으로 빠져버리는가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어린 영혼에서 이처럼 강한 의지를 기대하기에는 우리 주변의 현실은 지독히 어둡고 잔인하다. 이즈미와 고즈에가 사랑한 <백조의 호수>, 오데트를 사랑하면서도 오딜의 음험한 매력에 빠져든 지그프리트처럼 인간은 어둠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나 결말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장면은 작가에게 종국에는 비극을 넘는 희망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의 결과가 좌절이라고 해도 거기서 끝은 아니다. 어두운 악의가 우리를 갉아먹는 이 세계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빛을 선택한다. 밝은 곳을 향해 뛰어오른다. 


글/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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