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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n 30. 2021

사물과 사람_나의 영국 채리티숍 순례기

“아! 이거 지금 막 매대에 놓은 거예요.” 스테인리스 3단 찜냄비와 테팔 프라이팬을 계산대에 내미니 봉사자로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안다. 들고 오는 것을 봤다. “제가 오늘 운이 좋네요.” 찜냄비가 있으면 옥수수, 가지, 호박을 찔 수도 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나 호빵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안 그래도 하나 사려고 지난번 장을 보면서 슈퍼마켓에서 봐둔 게 있었다. (만지작거리다가 놓고 왔는데 안 사길 잘했다.) 지금 쓰는 프라이팬도 오래되어 코팅이 벗겨져 부침개라도 부치면 자꾸 눌어붙는 바람에 새것을 사야 하나 고심하고 있었다. 졸지에 ‘득템’했다.  


간판


‘채리티숍’은 공익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비영리 자선 단체(그런 단체를 ‘채리티’라고 부른다)가 자신들의 활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운영하는 가게들이다. 중고물건을 판다. 한국의 ‘아름다운 가게’를 생각하면 비슷하다. (아름다운 가게는 영국의 옥스팜 숍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많다. 영국 전역에 1만 1천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내가 사는 이스트본 시내 중심가에도 큰길을 따라 적십자사, 영국심장재단, 암연구센터, 구세군, 옥스팜(글로벌빈곤퇴치), 마리퀴리(재가호스피스), 셸터(홈리스), 마인드(정신건강), PDSA(위기동물의료지원), 에이지(노인), 사마리안(자살예방), 디멜자(치매환자), WRSA(야생동물구조), 스콥(장애인), 세인트 윌프리드 호스피스, 체스트넛하우스(어린이호스피스병원) 등 여러 단체의 숍이 스무 개 가까이 있다. (시내에 커피숍이 스무 개 있으니 거의 그 수준으로 많다.) 그 가게들의 간판을 보며 걷고 있으면,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어려움을 누군가는 곁에서 도와주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고맙고 안심이 된다.


기회


숍에서는 옷, 신발, 가방, 책, CD, 주방용품, 기타 잡다한 물건을 판다. 전자제품이나 가구를 파는 곳도 있다. 대부분 지역 주민들이 기증한 물품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부자 동네로 쇼핑 원정을 떠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하고 나면 으레 채리티숍에 기증한다. 나도 옷장 정리를 하면서 옷가지를 갖다 준 적이 몇 번 있다. 팔릴까 싶어 망설였지만 깨끗이 빨아서 보냈다. 숍에서는 팔릴 만한 것은 매장에서 팔고, 나머지는 섬유류 재활용 업체에 보내 기증품의 90%를 처리한단다. 그렇게 재사용 혹은 재활용된 섬유류만 1년에 40만 톤이라니, 나의 낡은 재킷도 쓰레기로 땅에 묻히느니, 다시 살 기회를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거다. 

이런 가게를 부르는 이름은 나라마다 다르다. 영국이름 채리티숍(자선가게)은 ‘자선’에 초점을 맞췄다. 미국에서는 스리프트숍(thrift shop, 알뜰가게)라고 한다. ‘절약’에 방점을 둔다. 나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부르는 이름이 맘에 들었다. 거기서는 옵숍(oppotunity shop, 줄여서 op shop, 기회 가게)이라고 한단다. 그렇겠다. 이런 가게가 많아지면 물건도, 사람도, 자연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겠다. 


갈 데 


아침마다 출근 도장을 찍듯이 채리티숍을 기웃거렸던 때가 있었다. 딸 애린이가 돌 무렵이었으니 벌써 18년 전이다. 런던에 살았다. 가난했고 불안했고 우울했다. 갓 이민 온 외국인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갈 데가 마땅치 않았다. 그때 우리가 살던 동네에도 숍이 열 개쯤 있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으면서 가게에 오래 머무는 사람을, 그것도 매일 오는 사람을 싫은 내색하지 않고 품는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거기는 나 말고도 그런 사람이 여럿 있었다. 지루한 하루를 때우고 있는 행색 초라한 사람들. 어떤 날은 동선이 겹쳐서 같은 사람을 다른 가게에서 계속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 다니다 보면 새로 들어온 물건을 금세 알아볼 수 있다. 애린이 유모차도, 옷도, 그림책도, 노래 CD도, 린아가 태어난 다음에는 두 아이가 탈 수 있는 쌍둥이 유모차도 다 거기서 샀다. 


냄비와 빨간 바지


코로나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난 1년 반 동안 집에 갇혀 있었다. 그동안 다들 집 안 청소를 했나 보다. 다시 문을 연 숍에는 물건이 많았다. 손님도 많았다.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젊음은 존재만으로도 공간을 산뜻하게 만든다. 숍은 왠지 ‘힙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우리 아이들만 해도, 채리티숍에서 옷을 사면서 패스트 패션에 대해 더 비판적이 되었고 자원의 재사용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아졌다. 숍에 걸려 있는 슬로건을 눈여겨보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테면 홈리스를 지원하는 셸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아무도 구두가 50켤레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누구나 홈 하나는 필요하다.” 

애린이와 시내에 있는 스무 개의 숍을 순례하듯 돌아보면서, 그 옛날 유모차를 밀며 가게를 기웃거렸던 젊은 엄마가 떠올랐다. 이 가게들이 그 시절 나를 지탱했다. 나는 이제 중고 3단 찜냄비를 사면서 하나도 슬프지 않고, 어른이 된 애린이는 힙한 빨간 바지를 고르고 기뻐한다. 채리티숍, 내가 영국에서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글, 사진/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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