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만나요.” 무려 20여 년 만의 제주행이다. 고교 수학여행으로 제주에 간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민망할 정도로 옛날이다. 제주에 관한 기억이라면… 유명하다는 몇 군데(어딘지도 모르겠다.)를 둘러보고, 말도 안 되게 큰 지하 식당(환기가 안 돼 들어섰을 땐 이미 연기가 자욱했다.)으로 우르르 몰려가 “제주에 왔으니 흑돼지는 먹어야지!”라는 한마음 한뜻으로 순식간에 밥을 해치우고, 제주 특산물 판매장에 들러 돌하르방 모양의 유리병에 담긴 진액(뭔지도 모르겠다.)을 부모님 선물로 샀다.(그래야만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제주 한 달 살기’를 비롯해 ‘제주 러시’와 ‘제주 이주’가 한창일 때도 제주는 멀게 느껴졌다.(‘러시’라는 말에 질겁했던 거다.) 코로나 이전에는 여행을 간다고 하면 큰마음 먹고 휴가를 내 해외로 가는 편이었다. 이 꼴 저 꼴 안 봐도 되는, 기왕이면 멀리, 되도록 길게 가자는 쪽이었다. “아, 제가 이번에 휴가를 해외로 가게 돼 연락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일과 휴식이 뒤섞인 지 오래인 프리랜서는 일로 연락해오는 사람들에게 말할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러다 코로나며 개인적인 상황까지 하나같이 ‘괴랄’ 맞던 지난해를 보내며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마구 솟았다. ‘다르게’라. 그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자신을 갉아먹으며 살 수는 없지 않냐.’고 ‘좋은 사람들과 보낼 시간도 부족하지 않냐.’고 직감했고, 인정했고, 크게 깨달았다. 제주로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쯤이다. 동료들 덕분이었다. 오래 보고 싶은 사람들, 적어도 그들에게 내게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이다. 제주가 고향인 A는 서울살이와 영화 만들기에 지칠 때면 제주 숲으로 가 오래 걷다 온다 했다. 영화감독 B도 혼자 제주에 가 처음으로 스쿠터를 빌려 타다가 거친 제주 바람에 휘청거리며 넘어지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 말을 하면서도 완전 신이 나 있었다. ‘다르게 살고 싶다’는 내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같이 제주 갈 일을 만들어보자던 영화인 C도 눈을 반짝였다. 웬만한 풍파와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작은 거인들인 이 사람들이 ‘제주, 제주’ 하고 있었다. 이들의 말은 일단 경청해야 득이라는 생각을 하던 나로서는 솔깃했다. 그러던 차에 초대 전화를 받았다. 사실상 ‘나의 첫, 제주’였다. 아, 초대자에게 축복을!
5월, 제주 강정이다. 수확한 귤을 박스 포장하는 일을 하는 곳이라는 허름한 창고로 향했다. 동료 다큐멘터리스트들이 먼저 와 있었다.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 한 편을 두고 중간 시사를 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자리였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 한쪽 벽에 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2009년 1월의 기록이자 흔적, 일기이자 편지 같은 글, 제목 ‘친구 집에 놀러 갔다’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을 함께한 강정 주민들과 연대자들, 미디어 활동가들의 마음이 담겼다. 이런 문장도 있다. ‘동굴을 지나가야 해도 종종 놀러 갈게 그 時間들로.’ 칠흑 같은 밤에도 함께 놀 친구를 떠올리고, 놀러 가야 할 친구 집이 있음을 잊지 않겠다는 그 마음은 어떻게 다 가늠할 수 있을까. 어둠 속에서도 즐거움을 말할 수 있는 씩씩함을 어떻게 다 상상할 수 있을까. 문장 하나하나를 눈으로 찬찬히 더듬어본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어 사진으로 남긴다.
실은 ‘초대자’가 아니라 ‘초대자들’이라고 해야 맞다. 미디어 활동가이자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동료들이 나를 제주로 초대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보성에서, 부산에서, 강정 아닌 제주의 다른 곳에서 시간과 마음을 내 이곳 강정으로 왔다. 기적이나 행운 같은 걸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서로의 마음의 파동과 시간의 때가 맞아 이렇게 마주 앉아 안부를 물을 수 있다는 게 기적 같은 기쁨이자 진짜 운이 좋은 게 아닌가.
유럽에서 10년을 살다가 제주 강정 해군기지 운동을 하는 동료들을 만나면서 아예 이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온 D가 있다. 밀양 송전탑 투쟁 현장을 오가며 그곳의 할머니들과 오랜 관계를 맺고 또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E도 있었다. 카메라 앞 대상과 감독 자신이 물리적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해 관계의 항상성을 만들어야만 비로소 영화를 만들 용기가 난다는 F도 있다. 10년 이상 다큐멘터리 상영 일을 하며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을 바라봐온 G도 함께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적어도 이들에게 다큐멘터리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짐작해본다. 어떤 영화는 만드는 이와 아주 가까이 맞붙어 있고 만드는 이와 무척 닮아 있다. 이들의 영화는 그 쪽에 훨씬 가까이 있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 계속된다. 다큐멘터리, 제주, 강정, 일거리와 공부거리, 요리, 고양이, 텃밭, 파트너십, 건강, 그리고, 애정을 담아 BTS의 세계까지! 심각할 거 하나 없이 모든 게 다 사는 이야기였다. 사실상의 ‘나의 첫, 제주’는 그런 무수한 이야기와 그들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안녕… 나는 또 놀러 갈게.’ ‘친구 집에 놀러 갔다’는 그렇게 끝인사를 전했다. 그래, 다시, 제주로 놀러 가야지. 뭔가를 함께 만들려는 친구들이 있는 곳, 곁을 내주는 친구의 집이 있는 곳. 그곳이 무자비하게 변하지 않기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글/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