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Jul 12. 2021

말과 삶 사이_내 안의 타자성을 찾아서

<완득이>에서 <미나리>까지

“저게 뭐예요?” “수놈을 폐기하는 거야.” “폐기가 뭐예요? What is 폐기?” “말이 너무 어렵지? 수놈은 쓸모가 없어. 맛도 없고 알도 못 낳아. 그래서 우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야.”


영화 <미나리>는 미국 아칸소에 정착하고자 하는 한 한인 가족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 일곱 살 데이빗의 아버지인 제이콥은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10년을 일하지만, 보다 의미 있는 성취를 위해 아칸소의 빈 농지를 찾아 이사를 감행하고, 그곳에 한국 작물을 재배해 한인들에게 판매하려는 꿈을 꾸는 사람이다. 수평아리를 폐기하는 공장을 가리키며, 그는 아들 데이빗에게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타자로 살아가는 경험


그렇게 이동식 컨테이너박스에서 시작한 이 한국계 미국인 가족의 아칸소 생활은 생각 이상으로 쉽지가 않다. 농업용수가 부족해 물이 끊기기 일쑤고, 사소한 날씨 변화에도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적적한 타향살이 속에서 의지할 관계라도 좀 만들어보고자 나간 교회는 매우 친절하지만, 왠지 모르게 어색한 그 친절함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가 ‘완벽한 타자’임을 경험하게 된다. 교인들 사이에 쭈뼛하게 혼자 서 있는 제이콥, 동년배들에게 ‘귀엽다’는 칭찬을 듣고 어색하게 자리를 옮기는 모니카, 덩치 큰 백인들을 구경하기 바쁜 순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이들이 이 선량한 교회의 철저한 ‘손님’이자 ‘대상’이라는 것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2011년의 완득이가 2021년의 데이빗에게


그런 점에서 2021년의 <미나리>는 10년 전 우리를 찾아왔던 영화 <완득이>를 소환하게 한다. 신체장애를 가진 아버지, 지적 장애를 가진 삼촌과 살던 완득이가 담임 동주로부터 필리핀 어머니의 존재를 듣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공부도, 친구 관계도, 무엇 하나 잘 해내지 못하던 주변부의 완득이가 한국 사회의 타자일 수밖에 없었던 필리핀 어머니와 재회하며, 완득이네 가족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까지 조금씩 하나의 공동체로 성장해가는 이야기. 두 영화는 이주의 시대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형태로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러한 문화와 언어의 뒤섞임이 우리 사회로부터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나지막이 보여준다.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 


완득이에게 필리핀 어머니의 존재가 낯선 것이었다면, 영화 <미나리>에서는 한국에서 온 할머니 순자가 그러한 역할을 도맡는다. 부모의 이주로 어린 나이에 미국 사회에 진입하게 된 누나 앤과 태어나서부터 미국에서 자란 동생 데이빗은 한국에서 온 할머니 순자가 어쩐지 불편하기만 하다. 한국 할머니 순자는 쿠키도 만들지 못하고, 하루 종일 남자 팬티 같은 옷을 입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손녀가 마시려고 따라 둔 음료를 홀라당 마셔버리는가 하면, 입에 넣었다 뱉은 군밤을 손자에게 건넨다. 순자의 모든 것이 참기 힘든 데이빗이 답답해하며 외치는 말. ‘그럼 할머니는 뭐 할 수 있어요?’      


쓸모의 쓸모없음에 대하여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쓸모의 규칙은 반드시 다른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전 사회에서 용인되고 인정되었던 쓸모는 다른 사회에서는 대개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릴 확률이 높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주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의 무력감을 마주하는 일이고, 또 타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 <미나리>는 제이콥 가든의 농작물로서의 쓸모를 인정받지 못했던 ‘미나리’가 결국은 무너진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기회’가 되고, 이제는 뇌졸중까지 와 더욱 더 진짜 할머니답지 않게 된 ‘순자’로 인해 태어나고 단 한 번도 숨차게 뛰어본 일이 없던 데이빗의 심장이 처음으로 쓸모 있게 뛰게 되는 ‘쓸모없음의 서사’가 그려진다. 


건강한 사회란 이러한 ‘쓸모없음의 쓸모’가 무수히 발견될 수 있도록 작은 기회들을 열어주는 사회일 것이다. 또 ‘쓸모’라는 견고한 기준을 흔들어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사회일 것이다. 10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완득이는 지금쯤 한국 사회의 어떤 구성원이 되어 있을까? 어른이 된 완득이가 아칸소의 데이빗을 만난다면 그에게 어떤 말들을 건네줄 수 있을까? 완득이와 데이빗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안팎의 타자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타자성에 대한 고백이 되어야 한다. 어디서든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건강하게 해주는 미나리는 비단 한국계 미국인 가족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미나리는 낯선 땅에서 삶을 일궈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한 격려이자, 그렇게 극복해낸 삶들의 매 순간에 대한 감사와 찬사일지도 모르겠다.


글, 사진제공/ 김강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