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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l 27. 2021

당신의 시(時)로 나는 여름을 만지작거려요

아직은 다정함을 말할 때_

7월입니다.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나니 누군가에게 편지라고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에요. ‘시간은 흐른다’는 문장을 입안에 굴려봅니다. 그 말 하나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이제부터, 하반기’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노랑 신호등처럼 껌뻑대는 것만 같습니다. 머쓱하지만, 며칠 전에야 올해의 다이어리를 샀어요. 한때는 한 해 시작하면 으레 다이어리부터 사곤 했는데요. 언제부터인가 그조차도 하지 않고 있네요. 작심삼일이라고 해도 뭔가 해보겠다고 꼬물꼬물 하던 때도 있었고, 기복과 소망 성취를 늘어놓기도 했고, ‘To Do List’라고 적으며 ‘정신줄’을 부여잡기도 했는데 말이죠. 뭐 그때가 좋았다며 고개 돌려 지난 시간을 그리워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난 건 지난 거니까요. 그 대신 요즘은 원고 마감일과 수업 일정, 참여해야 할 영화제 등을 휴대폰 메모 창과 책상 달력에 부랴부랴 표시해둡니다. 눈에 확확 띄는 게 정신이 확확 들고 아주 좋습니다. 

그러는 사이 사라진 몇몇이 있어요. 도서관, 카페, 책상머리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치고 되지도 않는 글을 쓰던 무용한 시간, 대단한 건 없지만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던 허무맹랑한 말들의 무덤, 펼쳤다 덮기를 반복하며 길들여놓은 다이어리의 촉감과 특유의 물성 같은 것이겠죠. 그런 게 제 옆에 딱 붙어 있던 시절, 다이어리는 무슨 죄인지 저의 온갖 잡스러운 감정을 다 받아내 줬어요. 오해 마세요. 이때의 ‘잡스럽다’는 건 아주 좋은 상태의 다른 표현이니까요.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뻔뻔해지기도 했다가 민망해하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자포자기하는 ‘잡(雜)’ 그 자체인 거죠. 자아분열일까요? 아니면,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으니 그저 ‘Love myself’나 하자는 정신승리일까요? 일기, 메모, 낙서 그 무엇이기도 했던 문장들, 실은 그 무엇도 아니었던 난해한 감정의 덩어리는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원고 마감 노동자로 살다 보면(핑계죠), 청탁받은 원고를 쓸 때면(이것도 핑계일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정제된 글을 쓰기 마련이잖아요. (핑계를 세 개나 늘어놓았습니다) 괜히 있어 보여야 할 것 같고 점잔을 빼야 할 듯하고 사족인 걸 알면서도 그럴듯한 말이랍시고 덧붙이는 거죠. (제가 가장 경계하는 글입니다) 그사이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쓴 글, 쓰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서 마구 터져 나오던 글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그런 때가 있긴 했을까요. 그때는 언제였을까요. 까마득하게 느껴지자 괜스레 어깨가 시려옵니다. 정말, 시간이 흐르고 있긴 한가 봅니다. (괜히 시간 탓을 하다니요, 네 번째 핑계까지만 쓸게요.)     



무뎌지고 싶지 않아요. 더 자극받고 열려 있고 싶어요. 마음이 요동치고 흔들리고 출렁이면 좋겠어요. 좋은 것 앞에서, 귀한 것 곁에서, 다정한 것 뒤편에서 충분히 감탄하고 감복하고 싶어요. 그 좋은 걸 꼭 껴안아 주고 싶어요. 그럴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살고 싶어요.


그래서일까요. ‘고용한 맹렬’*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그것을 시인에게서 배워요. 안희연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꺼내 듭니다. 앞쪽 면지를 펼쳐보니 ‘2020. 9. 22 水’라고 적혀 있네요. 언제부터였는지 책을 산 날짜를 면지에 적어두곤 해요. 한참 뒤 다시 그 책을 꺼내 들면 메모한 날짜, 그때를 더듬거립니다. 그즈음의 나의 상태를 가늠해봅니다. 어떤 처지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던 때였나, 어떤 이들과 연락하며 지내던 땐가, 무슨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그 가운데서도 시집을 샀던 때라고 하면 영락없이 마음이 아팠던 때였을 거예요. 신기하고 이상하게도 시는 그런 때에 눈과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시인은 세상 모든 이가 잠든 시각에도 눈을 껌뻑이는 이, 가장 마지막까지 아파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요. 시를 껴안고 잠 못 이루는 시인의 시간을 감히 상상하지 못합니다. 

지난여름 세상에 나온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만난 건 그해 가을이었어요. 그 후 1년이 조금 못 되는 올여름의 초입에 다시 시집을 꺼내 듭니다. 여름이니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다시 보고 배우는 건 좋습니다. 아주 근사합니다.     


영락없이 마음이 아팠던 때였을 거예요


“‘여름’이라는 단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적의가 감춰져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풀과 나무들이 저토록 맹렬하게 자라날 수는 없다.”(<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안희연, 현대문학, 2019) 여름의 기세라면 안희연 시인만큼 잘 아는 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이때의 기세란 흔히 말하는 왕성한 번식과 성장을 향한 축원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시집에 관한 양경언 작가의 해설처럼 ‘불화를 껴안고 상처를 품은 채 이어지는 과정이야말로 삶의 연속성을 체득하는 진실한 방식일 수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안희연이 이해한 여름의 기세입니다. 제 안의 것을 꺼내 보일 수밖에 없는 존재는 살집이 찢기고 터져 무르는 고통 속에서도 세상 밖으로 속살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홀로 감당했을 파열의 통증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열과(裂果)>) 괜찮다, 열과여. 네 열망과 고통 그 하나의 몸이 만든 흔적을 더 사랑할 테니 안심하고 더 가열 차게 바닥을 적혀달라는 사랑의 고백이라니. 그로부터 여름은 새로워질 겁니다. ‘다 알 것 같은 순간의 나를 경계하는 일’(<추리극>)을 잊지 않으면서 계속 가보는 겁니다. 그렇게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여름 언덕에서 배운 일>)라고 하니 그것은 그것대로 기대해볼 일이겠지요. 결국 그것은 사랑으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었다’(<측량>)고, ‘주저앉은 뜀틀에서 바라보는 풍경을/그래도 나는 사랑한다’(<나의 투쟁>)고. 이 문장들을 눈으로 따르다가 살짝 고개를 들어 눈앞의 부박한 일상의 풍경 위에 ‘사랑’이라 눈으로 적어봅니다. 그렇게 시와 함께 이 여름을 통과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저 역시 ‘언젠가 무심히 정지 버튼이 눌리는 순간이 오겠지/그 순간이 나의 자세, 나의 영원이겠지’(<태풍의 눈>)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이대로도 괜찮은이대로는 안 되는


여름, 덕분에 당신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1년의 절반을 넘기고 맞는 후텁지근하고 습한 날씨 탓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날들이었어요. 어떤 날은 이대로도 괜찮은 것 같고 어떤 날은 이렇게는 안 될 것도 같습니다. 저만치 또 시간만 흘러갑니다.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고요, 시간이 알아서 잘도 갑니다.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린다’ 더없이 적확한 말로 시작했던 <시>처럼 사실 저도 아주 오래전부터 저만의 ‘흰 접시’를 찾아 헤맸던 것 같아요. 지금은…. ‘여름’이라는 단어를 입안에서 가만히 굴려봅니다. 혀끝으로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손끝으로 살포시 잡아 만지작거립니다. 여름은 시(時)를 만지기 좋은 계절인가 봅니다. 저의 ‘흰 접시’도 이쯤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부디, 그러하기를.


글/ 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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