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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l 27. 2021

사물과 사람_열아홉 살

우리 집 큰아이는 만 열여덟 살이다. 곧 열아홉이 된다. 9월에 대학에 간다. 집 떠나서 생활하는 것이 처음이다. 혼자서 밥 해 먹고 사는 게 걱정되었나 보다. 생일 선물로 전기밥솥을 사달라고 했다. 3인용 쿠쿠 보온밥솥을 주문했다. 밥솥이라도 딸려 보내면 나도 안심이다. 

열아홉 살. 아직 어른이 아닌 것 같은데, 그 길목에 있는 나이 같은데, 불행한 시대에는 그 나이에 온전히 어른이어야 했다. 열아홉을 먼 나라 전쟁터에서 보냈던 노인들을 만났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 한국에서는 ‘6.25전쟁’이라고,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한국전쟁(Korean War)’이라고 부르는 그 전쟁터에서 그들은 열아홉 살을 보냈다.    

  

백발노인


3년 전 쯤, 맨체스터에서 그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UN서포터즈’라는 대학생들이 와서 참전 장병을 위해 위문 행사를 했다. 당시 나는 한국전 참전 영국군 청년에 대한 책을 쓰고 있었다. 행사장에는 초청받아 온 백발노인들이 스무 명쯤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다들 빨리 집에 돌아가려고 서두르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 모인 노인들의 사정은 다들 비슷한 것 같았다. 본인이 아니면 부인이 아팠다. 몸은 느리고 마음은 급해 보였다. 아쉬웠지만 나도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인연은 신기해서, 내가 놓지 않으면 슬그머니 다시 손을 잡는다. 얼마 전에 잉글랜드 북부 지방에 사는 노인들을 만나고 왔다. 이번에는 길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브라이언의 얘기를 들려줄까 한다.      


입영통지서


열여덟 살 생일이 지나자, 그에게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당시 영국에서 남자는 만 18세가 되면 모두 군대에 가서 18개월 동안 복무했다. UN군으로 한국에 파병된 영국군 장병 8만 1천명 중 대부분은 그렇게 징병된 열여덟, 열아홉 살 청(소)년들이었다. 6주 동안 군사 훈련을 받고 한국으로 떠났다. 항해에만 한 달이 걸렸다. 그는 1952년 8월,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멈춘 후, 1953년 10월에 한국을 떠났다. 

그가 겪은 한국전쟁의 모습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 도착한 부산에서 본 것은 극심한 빈곤이었다. 자신도 가난한 지역에서 자랐지만, 피난민의 가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삼팔선 부근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다. 한 뼘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참호를 파고 중국군과 지루한 전투를 계속했다. 참호 안에는 손바닥만 한 들쥐들이 득실댔다. 쥐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전투 중에 자신이 죽인 중국군 병사의 시신이 바로 눈앞 철조망에 걸려 있던 적이 있었다. 얼굴을 위로한 채 고개가 꺾였는데 부릅뜬 눈이 내가 어디를 가든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눈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모습은 전쟁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상상하지 않았던 것은 이들이 겨우 열여덟 열아홉 살, 내 아이의 나이였다는 것이었다. 브라이언은 열아홉 살 생일을 참호 안에서 맞았다. 물론 생일 파티는 없었다.

참호 안으로 날아온 포탄으로 사상자가 발생한 날이었다. 피 흘리며 엎드려 있어 죽은 줄 알았던 잭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누군가 소리쳤다. “아직 살아 있어!” 잭은 등에 무수한 파편이 박힌 채 후송되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는 짓무르고 고름이 생기는 상처를 안고 60년을 살았다. 그 세월 동안 아내는 매일 상처를 소독하고 거즈를 갈았다. 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했다. “베로니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에요. 훈장은 그녀에게 주어야 해. 전쟁이 남긴 상처를 돌보는 사람들, 그게 어디 그 한 사람뿐이었겠어요? 한국에는 또 얼마나 많았겠어요?”     


게임 오버


1953년 7월 27일이었다. 그날 하루는 엄청 길었다. “오늘 밤 10시에 휴전된다는 걸 아침에 들었어요. 다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려고 초긴장했지요. 그건 중국군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하루 종일 죽은 듯이 고요했어요. 우발적으로라도 충돌이 일어나서 오늘 사상자가 나온다면 그건 얼마나 무용한 일이에요? 그런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질까 봐 서로 조심했지요.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밤 10시에 뿔나팔 소리가 들렸죠. 이제 전쟁이 끝난 거예요.”

놀라운 일은 그다음 날에 벌어졌다. “아침이 되자 다들 참호 밖으로 나왔어요. 중국군들도 나왔죠.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서로 총을 겨누고 포탄을 퍼부었는데, 서로 만나 악수를 했어요. 포옹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모두 한마음으로 기뻐했어요.” 이 얘기를 듣는데, 전쟁이 게임처럼 느껴졌다.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도 하다가 ‘게임 오버’가 된 것처럼 어이없고 싱거웠다. 악수와 포옹이라니. 그러면 그동안 이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죽고 죽였던 것일까? 이런 화해는 영국군과 중국군이 피차 외국 군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국군과 인민군이 격전을 벌인 전선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진


브라이언은 매주 일요일마다 영국 전역에 있는 지역신문에 독자 편지를 보낸다. “이 지역 사람 아무개 아무개는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전사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분은 사진을 제게 보내주세요. 그러면 그들이 묻혀 있는 유엔기념공원에 그 사진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에 있는 모든 지역 신문에 편지를 보내면 6개월이 걸린다. 6개월 동안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이 일을 14년째 하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이 사진을 보내줘서 지금까지 거의 400명의 얼굴을 찾아주었다. (영국군 전사자는 총 1천 명이 넘는다.) 이런 일은 세월이 최대의 적이다. 몇 달째 연락해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제 이 일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어느 할머니가 오빠의 사진을 보내왔다. 아직 접을 때가 아니다. 그는 이 일을 계속할 거다.

“이 일을 왜 하시나요?” “영국에서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이에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요. 군복무를 하는 열여덟 열아홉 병사들을 전쟁터에 보냈는데, 정작 돌아왔을 때 아무런 환영도, 도움도 없었어요. 우리는 기차표를 한 장 달랑 받고, 각자 알아서 집에 왔어요. 사람들은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국이 파병했는지 조차도 몰랐어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이 일을 하는 이유는… 그래도 지역신문에 이 마을에 사는 아무개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했다는 글을 실으면, 사람들이 알게 되지 않을까요. 한국전쟁에 젊은이들이 갔었다는 것을.” 그는 이 일을 전사자를 위해서 하는 것도, 한국인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오늘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늘 기억해줘요. 감사하지요. 유엔기념공원은 정말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어요. 영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잊힌 전쟁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얼굴


부산역에서 시티투어버스 레드라인을 타면, 부산대교와 부산항대교를 아찔하게 건너 첫 번째로 멈추는 장소가 유엔기념공원이다. 그곳에는 먼 나라 전쟁터에 와서 죽은 이들이 2천 명 넘게 묻혀 있다. 묘지가 조성된 지 올해로 70주년이다. 기념공원에서는 전사자의 사진을 모아 큰 걸개 막을 만들었다. 열여덟, 열아홉, 스물의 젊은이들. 그들의 얼굴이다. 


글, 사진/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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