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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l 27. 2021

하루하루 열심히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거죠 뭐.”

빅판 자서전_

어떤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니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에 달라붙은 상처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은 약이라는 말은 참말일까. 《빅이슈》 판매원이 되기 이전, 석재천 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 눈이 시큰거렸다. 그에게 상처는 봉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을 이끌어온 동력이었다. 그 상처에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함께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1965년 대구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 때부터 전국을 유랑해온 석재천 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부잣집 둘째 아들이 열다섯 살 때부터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를 떠돈 이유 


석재천(이하 석): 동자동으로 오기 전에 경기도 안산에서 15년 가까이 살았어요. 고향은 대구. 대구에서 15년간 살다가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서 왔다 갔다 하다가 나이 먹어버렸지. 하여튼 천지 사방 오만 데 다 댕겼어요, 제주도 빼고. 대전에서도 살았고. 전라도에서도 살았고. 공사판 노가다 같은 거 하면 전국 각지 다 다니거든. 내가 제일 아쉬운 게, 예전에 제주에 갈 일이 있었거든. 귤 따는 거 있잖아요. 그거 하면 5개월 정도 있어야 될 것 같아. 내 아는 사람이 같이 가자고 하는데, “제주는 장가갈 때 갈랍니다.” 하고 안 갔어요. 제주도는 신혼여행으로 가려고. 

김은화(이하 김): 그때 혹시 만나는 분이 있으셨어요? 

석: 없어요. 아홉 살 때 엄마 돌아가시고 내가 마음을 못 잡아가지고 자꾸 밖에 나가고 싶어. 집에 가만히 있었으면 돈 벌었지. 나중에도 술도 많이 먹고, 그때 몸 다 버렸어. 돈도 못 모으고. 여기 와서 돈 모은 게 최고 많이 모았어. 

엄마 얼굴은… 아롱아롱해. 엄마 있을 때는 재미있었지. 내가 어릴 때 엄청 까불이라, 말 많고. 지금도 말이 많은데 그때는 더 많았지. 가수들 나오면 노래 따라 부르고, 엄마가 박수 쳐주고 그랬어요. 옛날 생각하면 눈물 나지. 엄마 애 많이 먹였어. 엄마가 내 자는가 싶어서 몰래 시장 가려고 하면 벌떡 일어나서 쫓아가고. 시장에서 내 먹고 싶은 거 안 사주면 데굴데굴 뒹굴어버리고. 우리 집은 동인동인데, 대구 시내에서 가까워요. 동성로 바로 옆이니까. 그때 잘살았지요. 집이 한 200평 가까이 됐어요. 아버지가 페인트칠 기술자라 나가면 돈을 뭉텅이로 가져오니까. 일꾼들 일 시키고 아버지는 다른 데 가서 일 뛰고. 집에는 잘 없었지요. 

엄마가 내 낳고 나서부터 몸이 많이 아팠다고 하더라고. 내가 7개월 만에 나왔거든. 칠삭둥이라. 인큐베이터에 3개월 있다가 나왔어. 엄마가 혈압이 높은데 내를 임신해 있어서 약을 못 먹으니까… 엄마는 10개월간 임신하겠다고 하고 병원에서는 안 된다 하고, 아버지가 엄마 고집 겨우 꺾어가 내를 낳았지요. 

내가 몸이 약해서 여섯 살 때까지 걷지를 못 했어. 다리에 힘이 없어서 일어섰다가 픽 쓰러지고 픽 쓰러지고 하니까, 아버지가 걱정이 많았지. 저러다 앉은뱅이 되겠다 하고. 엄마가 그걸 보고 셋째는 10개월 만에 낳아야 한다고 고집 빡빡 부리다가 약을 못 먹어서 그리 되어버렸어. 엄마가 혈압 때문에 쓰러져서 병원 가니까 의사가 “아이고, 가망 없습니다.” 해요. 아버지가 그길로 엄마를 집에 데리고 와버렸네. 형하고 나하고 승질이 나가지고 집을 팔아서라도 엄마를 살려야지, 그대로 오면 어쩌느냐고. 집에 돈이 그래 많았는데… 엄마 돌아가시니까 화장해버렸어요. 어른들 말로 여자는 임신한 채로 죽으면 화장한대요. 경상도 법칙이 원래 그렇다고요. 어릴 때 불만이 많았지요. 

신사역 석재천 빅이슈 판매원

김: 1970년대는 화장을 거의 안 할 때인데요?(화장 비율 1970년 10.7%, 2019년 88.4%)  

석: 경상도는 여자를 차별하니까. 굉장히 심해. 엄마를 화장해버리니까 뿔따구가 더 나더라고요. 산소라도 있으면 찾아가는데…. 어릴 때부터 아버지랑 많이 싸웠어요. 그래가 열다섯에 “아버지, 나 나갈랍니다.” 하고 짐 싸서 나와버렸어요. 아버지가 일꾼들 월급 줘야 하는데 그 돈 들고 튀어버렸지. 그때가 2월인데 서울역 앞에, 지금도 기억나는 게 추워서 잠을 못 자겠어. 같이 올라온 친구들 옷 사주고 술 사주고 하다 보니까 돈은 다 써버렸고. 그때 가져온 돈이 200만원은 되었을 기라. 1980년도에 일꾼들 주려고 둔 돈 200만원(2021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954만 원)을 다 들고 나와버렸으니까. 

김: 그때 아버지한테 반항하는 마음이 있었나 봐요.

석: 반항했지. 아버지하고 싸우고 돈 들고 토껴버렸어. 아버지 잘 때 그 돈 들고 토껴버린 거야. 

김: 아버지가 아들을 찾으러 올 법도 한데요. 

석: 찾아왔지. 집에 데리고 왔는데 또 돈 가지고 토껴버리고. 세 번을 그래 하니까 포기해버리고 “니가 알아서 살아라.” 하대. 그때 이후로 아버지한테 돈 갚아줬지. 이상하게 대구에 있으면 일하기 싫어. 서울에 있으면 열심히 하거든. 식당에도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아. 회사도 그렇고. 서울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 대구에 있으면 왜 그런가 모르겠어. 

김: 지금은 대구에 누가 계세요?

석: 형님이 당뇨를 앓다가 돌아가셨어. 이복 여동생 있어. 울산 산다고 형한테 들었는데 지금은 전화번호를 몰라. 전화번호를 입력해놨는데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 애를 내가 많이 두들겨 패서 그런가, 내가 전화하면 뚝 끊어버려. 나를 무서워해. 새엄마가 예전에 내를 많이 두들겨 팼거든. 새엄마 대신 니가 맞아라 하고 동생을 때렸지. 아버지도 10년 살다가 이혼해버렸어. 내 두드려 맞는 거 아버지가 봤거든. 형은 내하고 나이가 14년 차이 나니까 집에 잘 없었어. 항상 깜깜해지면 들어오고 그랬지.      


서울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

성실하게 일하고성실하게 마셨던 나날   


김: 10대에 서울역에 올라와서 노숙하신 거예요?

석: 예. 1981년도인가. 그때 지하철 2호선 공사하고 있었을 때니까. 서울역 앞에 집 나온 애들 많았거든. 그런 애들 팔아먹고 그랬어. 서울역이 무서운 곳이라, 지금은 아니지만. 나도 열다섯 살에 올라와서 뭣 모르고 한 번 팔려갔지. 성남 모란시장에 있던 가발 공장인가, 한 달 지났는데 월급을 안 줘. 월급을 왜 안 주냐고 물어보니까 니 팔려왔대. 밥 한 그릇 사줄게 내 따라가자 하는 사람이 있었거든. 남들 다 자고 있을 때 몰래 살짝 일어나서 도망쳐버렸지. 서울 올라와서 그 새끼를 찾아봤는데 안 보여. 

그러다 인제 서울역 보면 직업소개소 간판 많이 걸어놨잖아. 거기 찾아가면 무조건 식당으로 연결해줘요. 분식집이나 한식집 아니면 중국집. 주방 시다 일이 고됐지. 그래도 재미있었어. 몸은 불편해도 마음은 편하니까. 내 또래 애들이 많았어요. 주방장도 내 또래고, 그 밑에도 내 또래고. 근데 걔들은 술을 잘 안 마셔. 가끔 가다 마시긴 하는데 서로 피곤하니까 집에 들어가서 자기 바쁘지. 방은 거기서 얻어줬어. 하루에 14시간, 15시간씩 일했나? 아침 9시부터 일 시작해서 설거지하고 양파 까다 보면 밤 11시라. 일주일에 한 번씩 놀고. 그때 내가 월급을 많이 받았어요. 원래 사람을 두 명 더 써야 되는데 내가 다 해버리니까. 내가 일 잘했어. 주방장이랑 내랑 비슷하게 받았어. 내가 술을 좋아했거든. 쉬는 날 거기 가서 돈 다 날리고. 그때는 모든 게 즐거운 거야. 40대까지 식당에서 일했지. 그러다가 형이 음주 운전을 해서 사고가 크게 났어요. 형이 역주행을 한 거야. 정면충돌했는데 그 차는 멀쩡하고 형 차는 날아가버렸어. 상대방은 코란도, 형은 티코. 그 사람은 멀쩡하고 형만 응급실에 실려 가고. 1995년인가 1996년인가, 사고 난 바람에 집도 다 날려버렸어. 그때 돈이 100억 원 가까이 나왔어. 주사 한 방에 1500만 원인데. ‘계대 병원(대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불사조’ 하면 다 알아. 다 죽었다가 또 살아나고, 괜찮다 싶으면 중환자실 또 올라오고 하니까.  

내가 그때 형 간호하면서 고생 무지했어. 4년 정도 버텼나. 어휴, 내가 가려고 하니까 형이 붙잡고 난리야, 가면 안 된다고 하면서. 얼마나 짜증 났는가 몰라. 나중에는 내가 병들어버렸어. 그때부터 몸이 좋지 않더라고. 누가 있으면 교대라도 할 텐데, 교대할 사람도 없지, 그때 생각만 하면…. 간호하다 지쳐서 몸은 몸대로 나가버리고 얼굴이 맛이 가버렸잖아. 얼마나 성질이 나는가. 서울에서 일할 때 모아둔 500만 원도 형 병원비 댔잖아. 주기 싫었는데 아버지가 하도 달라고 해서 줘버렸어. 집도, 땅도 다 팔아버리고. 아버지가 완전히 정신이 홀딱 나가버렸어. 

형이 병원 나오고 나서 바로 IMF(외환 위기)가 터졌어. 나는 그냥 서울 가서 살란다 하고 서울에 왔지. 근데 서울에 일자리가 없어서 안산 와서 일용직 노가다 뛰었어. 안산에는 일자리가 많았어. 내가 배고프면 안산에 노가다 하러 가. 그때 내가 하루 6만 원 받았나. 파이프 자재 정리하고 청소하고 이런 거. 그때는 나가면 일은 무조건 해. 돈도 바로바로 받고. 그러니까 일을 매일 댕겼지. 한 달에 20일 가까이 일했어. 그 돈도 술로 다 날려먹고. 

김: 1997년에 IMF 구제 금융 받았을 때, 서울 이외 지역의 공사 현장은 별 타격이 없었나 봐요? 

석: 지금이 경기가 더 나빠요. IMF (외환 위기) 터졌을 때보다. 우리가 국력이 세계 10위니 경제성장을 했느니 하면 뭐하노. 나는 그런 거 뉴스에 안 나오면 좋겠어. 그 돈이 우리한테, 국민한테 와야 되는데. 우리한테 오는 게 뭐 있나. 

김: 그러게요. 빈부 격차가 갈수록 커져서 큰일이에요. 몸은 언제부터 나빠지셨어요?  

석: 노가다 다닐 때 물이 자꾸 먹고 싶어. 물 마셨는데도 돌아서면 또 물이 마시고 싶더라고. 그게 당뇨인 줄은 몰랐어요. 내가 결핵을 앓아서 병원에 있었는데, 의사가 당뇨가 있다고 하는 거라. 그때 병원에 6개월 있었어. 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완전 깜빵 생활이지. 병원에서 내를 기초생활수급자로 다 만들어줬어요. 동자동은 병원에서 가라고 해서 갔지. 이제는 술 못 마셔요. 열다섯 살 때부터 쉰다섯 살 때까지 하루에 소주 한 병씩 마셨는데, 지금은 몸이 이래서 못 마셔. 가끔 가다 피곤하면 소주 한잔씩 했는데 요새는 술을 못 마시니까 죽겠어. 담배는 죽어도 못 끊겠어요. 병원에서 담배 끊으라고 난리인데 “아이고, 차라리 죽을랍니다.” 소리가 절로 나와. 

김: 아유, 담배 끊기가 어렵죠.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함께하는 친구인데.      


그냥 사는 대로 살았지 뭐.”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김: 혹시 전에 만난 분 중에 같이 살고 싶은 분이 있으셨나요?

석: 오래 만난 적은 없고 매일 하루살이. 소개로 두 번인가 여자 만나보고 안 만났어요. 울 아부지가 니 성격에 여자가 괄괄해서 니를 휘어잡아야지 안 그러면 못 산다 하대요. 결혼한 사람은 대구 친구들밖에 없어요. 걔들 맨날 나한테 뭐 사달라고 하고 꽁보리밥 먹고 그랬는데. 나는 갈치에 계란 후라이 먹고. 엄마 살아 있을 때는 잘 먹었지. 

김: 선생님은 나름 자유롭게 잘 사신 것 같아요.

석: 예전에는 잘 살았지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 기가 팍 죽어버렸어요. 엄마가 있었으면 내가 잘되었을 건데, 대학교까지 나왔을 텐데, 나는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어요.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집에 들어가기 싫더라고요. 학교도 안 가려고 하고. 그때부터 농땡이 피우고 제멋대로 살고. 

김: 어린 시절에 상처가 있긴 하지만 아버지한테 반항도 해볼 만큼 해보시고, 서울 와서 열심히 일해서 인정도 받으시고, 그 돈을 맘대로 써보기도 하고 그러셨네요. 

석: 토요일, 일요일에 대구 내려가서 아버지한테 돈도 주고 그랬어요. 

김: 아버지한테 왜 돈을 주셨어요? 그 돈 없어도 사실 만큼 부자잖아요.

석: 아버지가 대구 내려오지 말라고 그 돈 아끼라고 하대요. 

김: 아들 생각해서 그러셨구나. 선생님은 돈을 좀 갚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고. 

석: 나중에 아버지가 형 병원비 낸다고 강제로 돈 빼앗아서 그렇지, 하하. 그 전에는 돈 안 모았어요. 맨날 술 마시고. 살면서 후회되는 건 없는데, 뭐 그런 거지. 그때 술 진짜 많이 마셨다. 새벽까지 마시고, 아침에 발딱 일어나서 일 나가고.  

김: 성실하게 벌어서 성실하게 술 드셨네요, 하하. 《빅이슈》도 한 달에 22일씩 나와서 파시는 걸 보니까 무척 성실하신 것 같아요.  

석: 그건 아니고 나중에 언제 아파서 일을 쉬어야 할지 모르니까 돈을 모아놨어요. 임대주택에 들어가긴 해야 되는데, 동자동에서도 떠나야 되는데. 재개발이 될는지 어쩔는지…. 사무실에서 연락을 해야 내가 임대주택에 들어갈 건데. 이번에 신용 회복 신청해놨어. 신용을 회복해야 내 통장으로 돈을 넣으니까.     


*동자동 재개발 이슈: 동자동 쪽방촌 일대가 2021년 2∙4 부동산 대책에 포함된 공공 재개발 사업 1호로 추진되고 있다. 기존 쪽방촌 주민은 이곳에 짓는 임대주택에 정착하게 될 예정이다. 쪽방촌 주민들은 공공 재개발에 찬성하지만 토지 소유자들이 반대하고 있다.      


김: 일을 열심히 하셨는데 어쩌다가 신용불량자가 되셨어요? 

석: 어릴 때는 집에 돈 있겠다, 카드로 친구들 밥 사주고 그랬지. 예전에는 빚을 지면 아버지가 갚아줬거든. 또 까불고 다니다가 1억 얼마를 빚져버렸어. 아버지가 없는데 빚을 어떻게 갚아. 

김: 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은 오히려 돈을 모으시네요. 

석: 예전에 이래 열심히 했으면 돈 많이 벌었을 긴데.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몇 개비만 피웠으면 잘 살았을 건데. 지금은 몸이 안 따라줘. 

김: 지금도 나름대로 잘 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석: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거지 뭐. 

김: 저도 그냥 살아요.(웃음) 요새는 다들 그런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죠. 선생님은 《빅이슈》 팔 수 있으니까 팔고 계시고요.   

석: 내 생각에 나는 빅이슈에 들어오길 잘했어.   

김: 그러니까요.(웃음) 얼른 백내장 치료받으시고 신사역에서 오래도록 건강한 모습으로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석: 내일 신사동 가서 내 옆에서 어묵 파는 사람한테 좀 더 기다려달라고, 내 쉬고 돌아오겠다고 얘기해야지. 오래 놀면 안 돼. 단골 다 떨어져나간다니까. 내하고 최고 친한 단골 독자 ○○ 아가씨가 내 왜 안 나오나 하겠다. 하하.(그는 7월 5일 현재 신사역 8번 출구 앞을 지키고 있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기 위해 열다섯 살에 집을 나갔던 소년은 15년 뒤 형을 간호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 자금을 훔쳐 달아났으나, 이때 아버지의 부탁으로 그때까지 모은 돈을 몽땅 형의 병원비로 내주었다. 그가 원해서 형을 돌본 것도, 병원비를 보탠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주었다. 그가 평생 그리워한 어머니가 그랬듯이. 어떤 작가가 말했듯 사랑은 받은 적 없는 사람에게 돌려주는 불공평한 이어달리기인 것 같다.  

“그냥 살아가는 거지 뭐.” 석재천 님의 이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젊은 시절, 혼자서 세상을 자유롭게 떠돌았던 그는 이제 매일 같은 장소에 나와 잡지 파는 재미로 살아간다. 아파서 그 좋아하던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끊어야 할 판이지만, 그 와중에 신사역 8번 출구로 꼬박꼬박 출근한다. 며칠 전,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본인이 잡지에 나왔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당뇨가 심해서 백내장 수술을 당분간 미뤘는데, 그동안에도 계속 《빅이슈》를 팔러 나갈 거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자기 몫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삶의 형태는 상관없다. 때로는 상처와 감정에 휘둘리고 육신의 한계에 휘청일지라도, 그저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그것은 아마 우리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 김은화, 사진/ 김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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