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지옥이 산다. 마음이 지옥과 같은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선 도무지 이 시기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지옥에 있으니 지옥 바깥은 보이지도 않고 죽을 때까지 이 지옥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내 마음은 지옥이고, 학교든 회사든 싫은데 꾸역꾸역 나가야 하고. 눈 뜨고 있는 이 모든 시간이 지옥인데, 숨을 쉬는 것조차 싫다. 밤에 집에 돌아와 혼자 방에 누우면 지옥의 바람이 마음속에 더욱 세차게 분다. 오늘 하루를 복기하면 순간순간이 끔찍하게 느껴지고, 모든 사람이 밉고 질투난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나 빼고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나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던 친구는 이미 저만치 앞서 나가며 내가 원했던 바를 이뤘다. 피드에 올라오는 예쁜 공간, 멋진 데서 파티처럼 즐거운 인생을 사는 친구. 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미 이루고 성공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며 활짝 웃고 있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인생에 점수가 매겨진다. 유치원에 가서 가장 많이 듣는 말도 “자 이번엔 누가누가 잘하나 볼까요?”다. 아이들이 규칙에 맞춰 선생님의 말에 잘 따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다른 친구와의 비교’다. 성장 시기에 비교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직 단체 생활의 규칙에 대한 선행 학습이 없는 상태에서는 옆 친구의 행동과 말을 보면서 따라 하고 그에 맞춰 행동하려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성적’이라는, 숫자 데이터로 남는 순간부터 우리는 경쟁이라는 트랙 위에 서게 된다.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받고 성적에 따라 서로 다른 상위 학교에 입학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배운다. 같은 대학, 학과라고 해도 졸업 후에 어느 회사에 입사하느냐에 따라 동창 사이에 서로 순위를 매긴다. 쟤는 나보다 큰 회사에 갔네, 쟤는 나보다 연봉이 높네, 쟤는 벌써 집을 샀네 등. 거기다 과거에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반박이라도 했지만, 요즘은 행복을 성적순으로 매기는 것이 공정한 경쟁이란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전교 30등까지만 특별반을 꾸려 자율학습 대신 보강을 시켰다. 보충 강의라고 해서 외부 강사를 초빙하는 것은 아니고, 어차피 낮에 수업해주던 학교 선생님들이 저녁에 추가로 하는 수업이라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특별반 소속이었다. 그 친구는 못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똑같은 수업을 받느니 차라리 학원을 다니는 게 낫다며 투덜거렸다. 우리는 모두 그 친구의 푸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더 배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이름도 특별한 특별반이라는 것만으로 그 친구는 우리와는 다른 계급처럼 보였다. 하루 세 시간 남짓 취침하고, 커피 알갱이를 씹어 먹으며 코피 쏟아 공부해 사시, 행시에 합격했다는 전설처럼, 사람들은 공부를 누구나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런 사례들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매우 특별한 일이기 때문에 TV에 나오고 책도 쓰는 거다. 타고난 지능, 가정환경, 체력 등… 공부 유전자에 따라 성적은 달라진다. 이걸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의 변명이라 치부하는 사람은 이 글을 그만 읽어도 괜찮다. 나는 공정한 경쟁이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쪽이다.
남과 경쟁하고 비교하는 버릇은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에 나와도 남과의 비교는 계속된다. 그것은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습관이 되어버린다. 우월감은 남보다 내가 낫다고 느끼는 감정이고 열등감은 내가 남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둘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 같지만, 사실 깊이 연결되어 있다. 윤여정 배우 역시 <문명특급>에서 말했다. “우월감과 열등의식은 같이 간다.”고. 이 명언이 나온 인터뷰의 맥락을 살펴보면 연예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쉽게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다가 우리는 자꾸 남과 비교하고 최고가 되려 한다고. 근데 꼭 최고가 되어야 하느냐, ‘최중’이 되면 좋겠다며 말했다. 자꾸 남에 대해 평가하는 것도 열등의식이고, 열등의식은 우월감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마음이 지옥이다. 열등감이 들 때 나는 그렇다. 10년 전엔 나와 비슷했던 친구의 연봉은 이제 내 세 배가 넘는다. 아파트를 사고, 명품백 할인 행사가 열리는 백화점 앞에서 ‘오픈런’을 한다는 친구,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친구 집에는 햇빛이 눈부시게 들어오고 해외 브랜드 조명과 진짜 가죽 소파가 거실에 놓여 있다. OO스타일을 검색해 비슷한 디자인의 ‘저렴이’로 덕지덕지 꾸며놓은 내 거실과는 다르다. 인테리어 잡지, ‘오늘의 집’ 집들이에도 초대된 친구의 집에 가짜 가구는 하나도 없다. 내 딴에는 안간힘을 다해 나답게 꾸며놨다 자부했던 내 집이 한껏 초라해 보인다. 커리어도 그렇다. 나는 실력이 안 되어 포기한 일을 해내는 사람을 보면 내 마음은 지옥이 된다. 마음속으로 그의 성공을 폄훼하고, 그가 낸 결과물에서 애써 단점을 찾아낸다. “저런 걸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악플러가 되어 맘속으로 수백 개의 악플을 쓴다. 나보다 잘 사는, 내가 원했던 것을 먼저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빛나는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에 지옥을 키운다. 누군가를 질시하는 내 얼굴은 생기라곤 없이 못생겼다. 거울 속에는 못난 악귀가 뚫어져라 나를 본다.
가토 다이조의 <비교하지 않는 연습>에는 열등감에 대한 금과옥조와 같은 문장들이 쏟아진다.
열등감은 자신에게 없는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착각이다. 달리기가 느린 것이 콤플렉스인 사람이 있다. 그가 인정하는 유일한 가치는 달리기가 빠른 것이므로 그는 달리기가 빠른 사람을 존경한다. (중략) 자신을 평가할 때도, 타인을 평가할 때도 이처럼 왜곡된 가치관을 적용한다. 이래서 열등감이 무섭다. 달리기가 빠르고 느린 것 외에도 얼마든지 다른 가치가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열등감과 우월감만이 생의 동력인 사람은 자신을 증오할 뿐 아니라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증오하고, 자기 기준에서 자기보다 뒤처진 사람에 대해선 쉽게 경멸하고 혐오를 드러낸다. 자기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가치를 자신이 달성했다면 그 경멸은 더욱 심해진다. ‘열심히 하면 되는데, 열심히 안 한 네 탓이야.’ 혹은 자신이 중히 여기는 가치에 반하는 자기 삶을 증오한다. ‘난 왜 이거밖에 안 되지. 세상은 왜 날 알아주지 않지.’ 마음속에 지옥은 갈수록 넓어지고, 그나마 나의 좋은 성향조차도 점차 그 지옥이 좀먹는다.
남과 비교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뒤처진 사람이다. 한국에서 삶의 정상 궤도라고들 생각하는 결혼, 출산, 육아를 모두 달성하지 못했고 보통의 직장인 친구들에 비해 연봉도 낮고 모아둔 돈도 없으며 내 이름으로 된 부동산도 없다. 그렇다고 혼자 인생을 즐기며 파티를 하고 쉬지 않고 연애를 하며 사는 것도 아니다. 퇴근 후 하는 일이라곤 고양이가 있는 집에 돌아가 혼자 저녁을 차려 먹고 못다 쓴 원고를 쓰거나, 만화책을 보거나 드라마를 보는 일뿐이다. 내가 사라진다면 세상에 내가 남긴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죽은 후 제삿밥을 챙겨줄 자식도 없다. 쓰다 보니, 자꾸 눈물이 나네? 나를 미워하려면 나는 얼마든지 한심해할 수 있는 환경이란 소리다. 그럼에도 마음속에 지옥을 키우지 않으려 안간힘을 낸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살을 시도한 팬에게 써준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1. 절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 그건 그 사람의 하이라이트를 내 무대 뒤와 비교하는 것과 같다. 2.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 너무 먼 미래를 보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3.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행복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빛나는 하루와 남루한 내가 비교될 때 나도 되새긴다. 저 사람은 자기 삶을 살고 있고, 나는 내 삶을 살면 된다고. 남을 기준 삼아 나를 평가해선 안 된다. 나는 어차피 저 삶을 살 수 없고, 지금 삶도 내가 이뤄낸 거다.
살면서 나와 잘 맞는 사람만 만나며 살 수 없고, 나에게 호의적인 평가들만 들을 수도 없으며 원하는 일만 할 수도 없다. 누구나 돈을 많이 벌 수도 없고, 누구나 일한 만큼 제대로 평가받을 수도 없다. 그걸 알지만, 그렇다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마다 “헤헤, 산다는 건 그런 거 아니겠니.”라고 웃어넘길 수 있다면 속세에 있을 필요가 없을 거다. 나만 특별히 운이 없는 게 아니라, 삶에는 어쩔 수 없이 억울함이 내포되어 있다는 걸 나이 들수록 느낀다. 물론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다. 나만 힘든 게 아니고, 다들 힘든 걸 안다고 해서 나의 힘듦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비교를 안 한다면,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면 조금 덜 힘들 순 있다. 남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이 나의 기준이 된다면. 경주마가 앞만 볼 수 있게 시야를 가리는 눈가리개처럼, 때로는 옆 트랙을 보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그냥 앞만 보는 거다. 내 앞에 놓인 내 트랙만.
글/ 김송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