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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Sep 09. 2021

글라디오_내가 주인공인 이야기

홈쇼핑 방송국에서 성우로 일했던 적이 있다. 내게 주어진 일은 스튜디오 한쪽에 마련된 부스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피디의 지령을 기다리다가 “오늘이 지나면 절대 돌아오지 않는 가격!” 따위를 외치는 일이었다.


방송 시간의 대부분은 쇼호스트의 목소리로 채워진다. 모니터에는 실시간으로 주문 전화의 수와 상품 구성별 주문량 등이 뜬다. 쇼호스트는 그 숫자들을 통해 자신의 진행에 대한 모니터를 실시간으로 하는 셈이다. 성우의 멘트가 나가는 동안 노련한 쇼호스트들은 담당 피디와 소통하며 끊임없이 작전을 새로 짠다. “지금 이 구성이 덜 나가고 있으니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더 할게요”, “이건 더 푸시를 해도 안 나갈 것 같은데 차라리 잘 나가는 것부터 빨리 매진시키죠.”… 그는 방송을 책임지고 있다. 물건이 많이 팔리면 그의 공이고 잘 안 팔리면 그의 책임이다.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나는 저렇게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고 있으면 금세 유체 이탈을 경험하게 되리라. 나는 소심하다. 그에 걸맞게 혈액형도 A형이다. A학점은 거의 받아보지 못했지만, 내 피에는 아주 진한 A들이 흐르고 있다. 소심한 사람들은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본다. 한 선배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너는 인터뷰 같은 거 하면 곧잘 말을 하면서 왜 이런 회식 자리에서는 말이 별로 없어?”

“아… 저는 말을 하다 보면 사람들 눈치가 보여요.”


지금 내가 하는 말 너무 재미없는 거 아냐? 내가 너무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나? 내가 너무 혼자 진지한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 저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심지어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동공을 흔들며 속으로 이런다. ‘내가 너무 혼자 오래 말하나?’

나를 어느 정도 드러내고 표현하고 싶긴 하지만 너무 관심을 받거나 노출이 되기는 싫었다. 그런 면에서 성우라는 직업은 완벽해 보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스스로 쥐어짤 필요가 없다. 내가 해야 할 말은 대본에 다 쓰여 있다. 내 얼굴을 사람들에게 내비칠 필요도 없다. 나는 목소리만 빌려주면 된다. 얼굴이 안 보이니까 대본을 외울 필요도 없다. 그럴 줄 알았다.


뭘 얼마나 견뎌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2년간의 전속 성우 생활을 몇 개월 남겨두었을 즈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심규혁 성우님이시죠? 저희가 이번에 오프라인 행사를 기획 중인데요. 혹시 성우님께서 출연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오프라인 행사요?”

“네, 무대 위에서 간단한 목소리 연기 시연이랑 게임 같은 거 하시고, 편안하게 프리 토크 하는 순서로 진행될 예정이에요.”

“아… 저는 아직 전속 신분이라 소속 방송국 더빙 말고 다른 일은 공식적으로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성우님 프리랜서 된 후로 일정을 잡고 있습니다!”

“……!!”


그렇게 프리랜서가 되자마자 오프라인 행사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숨을 참고 물에 잠깐 얼굴을 담갔다 빼는 거야, 하며 시작을 했던 게 이제는 얼마나 얼굴을 내밀었는지 셀 수도 없다. 낭독극을 하지 않나, 연극 대본을 외워 팔자에 없던 공연을 올리지를 않나, 남의 나라 수도에까지 날아가서 행사를 하고, 보이는 라디오에 인터뷰에, 며칠 전에도 얼굴에 분칠을 하고 녹음 현장 메이킹 촬영이니 유튜브 촬영이니 정신없이 카메라 앞에 서고 말았다.

“아니, 그럼 거절하시지 왜 자꾸 출연을 하세요?” 그러신다면, 거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나는 살면서 아예 포기해버린 일들이 많다. 대부분의 운동을 비롯해, 요리라든가 가드닝이라든가, 잘하고자 하는 의지가 쥐뿔도 생기지 않는 일들이 상당히 많다. 그래서 그 대신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웬만큼은 잘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내게 성우의 일은 결혼과도 비슷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결혼을 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일들에 대해 잘 알고 뛰어들지 않는다. 사랑해서 결혼을 선택했지만, 그 후에는 달콤한 일들뿐만 아니라 달갑지 않은 일들도 얼마든지 닥칠 수 있다.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설득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천장에서 물이 새는 것을 처리해야 할 때도 있다. 육아는 또 어떤가. 물건을 살 때 주의사항을 듣고 보험을 들 때 약관을 살펴보듯 미리 확인할 수 없는 일들이다. 아무리 내가 선택한 길이어도 고통의 크기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 뭘 얼마나 견뎌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뛰어들었고 할 수 있는 만큼은 가봐야 한다. 성우의 일도 꼭 그렇다. 예상치 못한 모습을 내비치며 뻔뻔한 얼굴로 나를 쳐다볼 때가 있다. 왜, 뭐, 어쩌라고. 그런 얼굴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우리 집 아기도 마찬가지다. 모든 걸 다 해줬는데도 토할 때까지 울 때가 있다. 그러고 나서 나를 쳐다본다. 왜, 뭐, 어쩌라고. 그런데도 왜 이 짓을 하는가. 그것도 왜 좀 더 잘 해보려고 애를 쓰는가. 고통의 크기가 확정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행복의 크기도 확정된 게 아니니까.

한참 말을 조금만 더 잘했으면 하고 관련된 책들을 이리저리 들춰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들춰보는 책마다 하는 소리가, 잘 들으란다. 아니, 평생 잘 듣기만 해서 내 말을 잘 못 하는 사람한테 지금 이게 할 소리야? 욕이 턱밑까지 차오르던 차에, 친한 선배로부터 같이 팟캐스트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래, 억지로라도 많이 떠들면 나아질지도 몰라.’ 그래서 라는 방송을 1년 정도 함께 했다. 처음에는 내가 다시 들어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떠드는 것 같았는데 계속하다 보니까 희한하게도 요령 같은 게 생겼다.

어느 날 방송이 끝나고 조촐한 회식이 있었다. 방송 멤버들 외에 다른 성우 선배들도 몇 명 참석한 자리였다. 한 선배가 물었다.


“매주 방송하기 힘들지?”

“그래도 배우는 게 많아요. 뭘 말하려고 하면 정말 정리가 안 됐었는데 좀 나아졌거든요. 부작용이 있다면 말이 많아졌다는 거?”

재수 없을까 봐 농담을 한 거다. 그런데 선배가 정색을 하더니,

“아마 말이 많아진 건 방송 때문이 아니라 네가 나이 먹어서 그런 걸걸? 원래 나이 먹으면 말이 많아지거든.”

“……!!!”


이제 소설을 한 이십 년쯤 썼기 때문인지,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도 요즘에는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가로채며 “다 비켜, 나만 말할 거야!”라고 외치곤 하는데, 이게 다 소설 쓸 때 배운 못된 버릇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소설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소설을 펼쳤는데,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면 누가 말하는지, 그러니까 화자가 누구인지 살펴보면 된다. 주인공이 아닌 경우에도 그는 주인공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러니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면, 화자라도 될 일이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 중에서


어쨌든 난 전보다 조금 말이 많아졌다. 말을 더 잘하게 된 것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렇게 된 게 팟캐스트 탓인지 나이를 먹은 탓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난 깨달았다. 나는 말을 잘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말을 좀 더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을 아무리 많이 해도 나는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고쳐 쓸 수 있는 것도 나의 이야기뿐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내가 쓸 수도, 고칠 수도 없다. 이 이야기가 괜찮다면 나의 공이고 별로라면 내 책임이다. 난 주인공이니까.



글. 심규혁

11년 차 성우. 디즈니 어벤저스 시리즈의 스파이더맨,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엘리오, <알라딘>의 알라딘과 애니메이션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 치아키와 MOBA 게임의 <리그 오브 레전드>의 에코 목소리를 연기했다. 일을 할수록 목소리는 좋아지는데 뇌가 퇴화되는 것 같아 글쓰기로 치료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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