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연장 전에 작성되었습니다.
굳게 문을 닫았던 집 근처 수영장이 재개장했다. 덕분에 1년 넘게 기근에 허덕였던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저녁마다 수영장으로 향한다. 수영장으로 바삐 달려가는 길에는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사진을 떠올린다. 완벽한 수평과 수직으로 직조된 파스텔톤 수영장과 원색 수영복을 입은 길쭉하고 가냘픈 소녀들. 사진 속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빠져나와 나의 밋밋한 ‘깜장’ 수영복을 꺼내면 왠지 조금 서글픈 마음이 든다.
평가보다 두려운 시선
‘깜장’ 수영복은 중급인 수영 실력만큼이나 애매모호하다. 수영인들은 실력이 뛰어날수록 화려한 패턴과 색감, 노출도 과감한 수영복을 입고 초급자일수록 노출을 한껏 거부하겠단 속내가 드러나는 5부, 3부의 무채색 수영복을 입는다. 고숙련자 ‘수영러’들이 물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등이 훤히 드러나거나 허벅지 라인이 과감하게 패인 하이컷 수영복을 택하는 이유는 알겠지만 패턴과 색감까지 화려해지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박태환도 아니면서 수영복은 왜 저렇게 화려해?’라는 따가운 ‘K–평가질’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라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실은 나도 매일 수영용품 쇼핑몰에서 화려한 패턴의 수영복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지만 어쩐지 그것이 내 몸에 걸쳐져 있는 모습은 거부감이 들어 장바구니 단계에서 포기하기 일쑤다. 평가보다 무서운 건 수영복 그 자체다. 중학생 때까지는 수행평가 항목에 수영이 있었고 매해 몇 학급씩 짝을 지어 수영장에 시험을 치러 갔었다. 다니던 학교는 13반까지 있었는데 1반부터 6반까지는 남학생 학급, 7반부터 13반까지는 여학생 학급이었다. 그런데 꼭 수영 수행평가를 하러 갈 때는 남자 반 두어 개와 여자 반 두어 개가 함께 갔다. 몸을 최대한 가리고 싶은 마음에 기를 쓰고 마트를 돌아다닌 끝에 원피스가 아니라 끈나시와 헐렁한 방수 팬츠로 된 수영복을 샀음에도 매번 그 시간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수행평가도, 흘긋대는 시선도 지긋지긋해 중학교 졸업과 함께 수영장도 졸업해버렸다.
끝나지 않는 고민과 보디 포지티브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러 우연한 기회에 수영을 다시 시작하게 됐고 수영복에 대한 고민도 함께 따라왔다. 어릴 때야 반바지 수영복을 입어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성인의 수영복 규정은 더 빡빡하다. 실내 수영장에서 투피스 반바지 수영복으로 입장을 제지당한 적도 있다. 허벅지를 전부 가리는 5부짜리 수영복을 입고도 너무 창피해서 준비운동이 끝나자마자 황급히 물속으로 뛰어들어가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영을 즐기는 지인에게 여섯 벌의 수영복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를 엊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수영복을 수영용 장비라고만 여겨왔는데, 그에게 수영복은 엄연한 패션이었다. 실제로 수영 커뮤니티에는 수영복을 여러 벌 돌려 입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수영복을 어렵게 느낀 이유가 뭘까. 아름답지 않은 몸이 창피해서? 이유를 추적하며 ‘보디 포지티브’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보디 포지티브는 말랐든, 살집이 있든, 장애가 있든, 어떤 몸도 혐오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운동이다. 패션계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퍼져왔지만 플러스사이즈라도 하얗고 예쁘고 조화롭고 탄탄한 몸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세태가 영 고집스럽게 느껴져 불편하다. 플러스사이즈에서도 루키즘을 찾다니 자본이 흡수하지 못하는 이데올로기란 없는 걸까. 그런 점에서 수영복이 불편한 이유는 ‘내 몸이 창피해서’ 혹은 ‘내가 내 몸을 긍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답은 그냥 ‘불쾌하고 불편해서’일 것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수영장에서 유별나게 자주 눈이 마주치고 시선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수영장의 탈코르셋
보디 포지티브라는 담론이 모든 몸에서의 아름다움을 ‘착즙’하는 것이나, 그저 존재할 뿐인 내 몸에서 눈요깃거리를 찾는 시선은 동일선상에 있다. 때로 아이쇼핑을 하다가 화려한 수영복을 보면 ‘내가 입으면 어떨까?’라는 궁금증과 ‘이런 수영복은 시선이 너무 집중돼서 싫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자유로워질 방법은 없는 걸까? 답은 수영복의 형태보다도 내외의 억압을 개선할 방안에 있어야 한다. 제모에 집착하지 않고, 꾸역꾸역 수영복 안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브라캡을 집어던지는 것도 선택지의 일부일 것이다. 모든 반동은 쉽지 않다. 여전히 온라인 쇼핑몰에서 ‘와 예쁘다’ 탄성을 내뱉고 저장하는 수영복이 앨범을 가득 채운다. 구매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면서, 밋밋한 수영복을 하나 더 살 생각도 없으면서 딱 거기까지의 행동이 반복된다. 변화란 충돌 속에서 새로운 결론이 도출되는 것일 텐데, 정말 오롯이 내 용기와 액션에 맡겨야 하는 걸까. 어제도, 오늘도 화려한 수영복을 사지도, 안 사지도 않는 가능태의 상태에서 머물러 있다.
글. 양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