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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18. 2021


외로운 여성 홈리스들의 비빌 언덕

홈리스들은 외롭다. 인간은 다 외롭다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더 많이 그렇다. 가족과의 동거나 왕래, 친구들과의 만남, 직장 생활 같은 사회적 교류가 현저히 적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명절이 되면 좀 더 쓸쓸하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자제하는 분위기지만, 설이나 추석 같은 때 민족이 이동하고 흥이 넘치는 풍경 속에서 홈리스들은 달리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외로울 수밖에…


가까이서 홈리스의 생활을 보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생략되어 단출하기 그지없다. 이를테면 가족과는 연락을 하지 않거나 연락할 가족이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성일시보호시설을 찾는 수많은 여성들과 접수 상담을 하면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가족이나 연락하고 지내는 가족이 있다고 답하는 예를 많이 못 보았다. 시설을 이용하는 홈리스 여성들이 어릴 적 친구와 연락을 하거나 만나는 것도 별로 보지 못했다. 일반 노동시장 진입이 힘들어서 동료들과의 일 수행, 회식 같은 어울림의 기회도 적다. 자신의 집이 없어 밥 짓고 반찬을 만들 기회도, 윤내서 청소할 일도, 쾌적하고 예쁘게 꾸밀 일도 많지 않다. 살림하고 일하는 데 쓰는 시간이 적으니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외롭거나 무료하게 보내기 십상이다. 홈리스란 그처럼 외로울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주류의 사회적인 것들로부터의 단절은 홈리스를 설명하는 큰 특징이고, 사회적 고립과 고독함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이번 추석을 며칠 앞두고 여성일시보호시설의 긴급 서비스를 받았던 몇 분이 인사를 하겠다며 찾아왔다. 그중 작고 예쁜 꽃을 들고 온 한 여성은 젊은 시절부터 60세가 넘을 때까지 일본에서 살던 분이다. 일을 하기 위해 건너가 몇 십 년을 타국에서 살다 어느 날 한국으로 추방당했던 그분은 집도 절도 없는 한국에 떨어지면서, 공항에서부터 홈리스가 되었다. 지금은 임대주택에 들어가 잘 살고 있어서 더 이상 홈리스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고적함은 여전한 편이다. 얼마 전 십 수년간 연락이 끊겼던 자매를 찾았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일상을 나눌 사람이 없으니 하루하루가 무료한가 보다.


“임대주택에 들어가 좋으시죠?” 물으면 “예, 편하고 좋아요.”라고 답한다. “요즘 어때요? 재미있으세요?” 물으면 “아뇨, 재미없어요.” 한다. “왜요?” 하니 웃고 말지만,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요즘 자신에게는 너무 익숙한 일본 말이 그리워 일본 방송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질 못하는 홈리스 여성이 119 이송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기력이 없나 보다 했는데 119가 이송할 병원을 찾는 사이 의식이 혼미해지면서 상황이 급박해졌다. 홈리스들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공공 병원이 대부분 코로나19 전담병원이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까운 민간 병원에 가야 했다. 병원에서는 몸속 어딘가의 염증 때문에 패혈증이 올 뻔했다며 응급 수술을 했고 이후 몇 주를 입원해 치료를 받는 중이다. 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니 진료비 해결이 큰 걱정이었다. 그럴 때 병원 측에서는 먼저 병원비를 부담해줄 가족을 찾는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 시설을 이용하기 시작할 때 자신이 10년 넘게 여의도의 큰 교회 앞에서 노숙 생활을 해왔다고 얘기했었다. 그렇게 긴 세월 노숙하는 사이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가족과 연락이 끊긴 지는, 이미 너무 오래된 일이었다. 지원 방법을 찾기 위해 해결할 일이 많아서 병원을 방문하니 간호사들에게 입도 뻥끗하지 않아 애를 먹이던 분이 시설에 다시 가고 싶다고도 하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동료 지지


가족과 친구와 이웃의 빈자리를 대신해, 어떤 홈리스들은 사회복지사들이나 비슷한 홈리스 동료들과의 정과 신뢰를 쌓으며 삶을 꾸려간다. 일시보호시설의 긴급 잠자리를 이용하고 나서 지금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영씨와 옥씨는 ‘절친’도 그런 ‘절친’이 없을 정도이다. 두 분 모두 고시원비는 주거급여를 받아 충당하고 생활에 드는 비용은 하루에 세 시간씩 공동 작업장에 나가 받은 수입으로 해결한다. 한 달 급여가 50만 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니 그야말로 최저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워낙 최저생계비 수준의 벌이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결근하면 생활이 훅 축난다.


그런데 영씨는 가끔 결근을 한다. 고시원에서 식사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날도 있다. 영씨는 자주 재발하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증상이 심해지면 기분만 가라앉는 게 아니라 몸 여기저기가 덩달아 안 좋아진다. 그런 영씨를 챙기는 게 옥씨다. 영씨가 밥을 먹었는지를 챙기고, 아프면 병원에 함께 가고, 사회복지사에게 영씨의 상황을 알려주고 병원 좀 데려가야 한다고 채근을 한다. 어디 갈 때마다 휘청휘청 기운 없이 걷는 영씨의 팔짱을 꼭 끼고 다니는 옥씨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옥씨는 아주 젊은 시절부터 보수도 없이 남의집살이를 하며 살던 분인데 글을 읽지 못하고 셈도 느리다. 공동 작업장에서는 주로 포장 비닐에 머리끈을 넣는 일을 하는데 이때 머리끈을 세어 정확한 개수를 넣어야지 불량이 아니다. 포장 작업이 끝나면 10개, 20개, 이런 단위로 꾸러미 작업도 해야 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몇 개를 완수했는지 보고도 해야 한다. 셈이 완벽하지 않은 옥씨는 실수가 잦다. 마무리 작업 때 영씨는 옥씨 옆에서 셈을 도와주곤 한다.





일시보호시설을 이용하는 여성 중 치매를 앓고 있는 70대 노인이 있다. 몇 십 년 외국 생활 후 귀국했는데 이미 정신 건강이 안 좋고 가족과는 연이 끊어진 이후라 거리를 헤매게 되었고 그러다 경찰에게 발견되어 시설을 이용하게 된 분이다. 수급을 만들어 전문 노인시설에 보내드리려고 준비하다가 그녀가 실종사망 처리가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렵게 자녀에게 연락이 닿았지만 어릴 때 헤어진 엄마에게 원망이 커서 시간을 내줄 마음이 없다 하였다. 자녀를 설득하고 법원에 서류를 제출하고 조사를 받으며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신원을 회복하기까지 전문 시설에는 갈 수가 없어서 일시보호서비스를 장기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긴 시간, 그나마 어르신이 버틸 수 있었던 게 손녀뻘 되는 홈리스 여성의 돌봄이었다. 젊은 홈리스 여성은 어르신이 생활실을 몰라 헤맬 때 방에 데려다주고, 자신의 물건이 어떤 건지 몰라 이 물건 저 물건을 사물함에 채워놓으면 짐을 구별해주고, 시설에 후원 의류가 들어오면 어르신에게 맞는 옷을 골라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시설 냉장고에 블루베리와 요거트를 쟁여놓고, 어디선가 블루베리가 머리에 좋다는 얘길 들었다며 할머니 머리 좋아지게 매일 먹여야 한다며 챙기기도 했다. 많은 이용인들이 둘이 알콩달콩하는 모습이 마치 친할머니와 손녀 같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는 복지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당사자들이 서로를 돕고 돌보는 걸 동료지원활동이라 하고, 동료지원활동을 보다 전문적으로 하도록 동료지원활동가를 육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꼭 전문적 동료지원활동가에 의한 돌봄과 지지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에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봐주며 보듬고 보살피는 모습들이 있게 마련이다. 홈리스의 삶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의 기본 생계를 어쩌지 못해 홈리스가 된 여성들도, 자신의 일상을 꾸려갈 힘이 도무지 없는 홈리스 여성들도, 서로를 챙기면서 공적 사회복지 서비스가 온전히 해결해주기 힘든 빈틈을 메워가고 있다. 홈리스 상태에서의 회복이 집의 회복, 가정의 회복만일 수는 없는 게 분명한 듯하다. 실타래 같은 다양한 연들이 서로를 챙기고 비빌 언덕이 되어줄 때 우리 삶의 외로움이 덜해지고 온기도 회복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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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진미


*이 글은 <빅이슈> 260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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