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가까이 밀가루와 술을 끊었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의 절반은 밀가루로 만든 게 아니던가. 인심과 민심은 글루텐에서 나는 게 아니었던가. 맛깔 나는 음식에 약간의 알코올을 곁들인 조합이란 또 얼마나 즐거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맥주 한잔 마시며 수다 떨기는 인생의 큰 낙이었다. 그것들과 잠시, 안녕했다. 여름을
보내며 갑작스레 찾아온 가려움이 이유였다.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가려움이 시작됐다. 냉방병이겠거니 소화불량이겠거니 했지 그게 전조인 줄은 몰랐다. 피부과 여러 군데를 다녔고 한의원에 가서 침과 약 처방을 받았고 내과에 가서 피검사도 했다. 돈이 와장창 깨졌다. 여기저기 전전하다 대학병원에서 처방받은 ‘강력한’ 피부약을 먹으면서부터 다행히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유가 뭐죠? 원인이 뭔가요?” 물어도 대답이 없다. 누구 하나 ‘이것이 문제입니다’라고 콕 짚어 말해주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지인도 원인 모를 근육통에 시달렸다. 그 역시도 여러 병원에 다녔지만 시원스레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대신 자가 진단과 처방으로 그는 글루텐 문제로 잠정 결론에 이르렀다. 웬만하면 밀가루를 피하고 더불어 커피와 술도 끊었다며 내게도 그렇게 해보길 권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운다는 게 뭔지 너무도 잘 알기에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위로의 고갯짓을 했다. ‘의사도 잘 아는 게 아니다.’ 이것이 내 잠정 결론이다. 여기가 문제인가 하며 이 약을 써보고 그게 잘 듣지 않으면 저기가 문제인가 하며 다른 약을 써보는 식이다. 피부 질환은 더욱 그런 것 같다. 대부분 스테로이드제를 처방하고 지켜보자는 말로 끝이다. 그사이 내 애꿎은 간 수치만 올라갈 뿐이다.
이유를 모른다는 것만큼 답답한 게 있을까. 통증을 공감받지 못하는 것만큼 서글픈 게 있을까. ‘아프면 나만 손해’라는 옛말 하나 틀린 게 없었다. 몸의 통증과 그로 인한 고통은 오롯이 아픈 자의 것이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누군가가 대신할 수도 없으며, 누군가에게 전가할 수도 없다. 나만의 것. 몸은 그만큼 절대적이고 개별적이다. 아플수록 자꾸만 내 안으로 파고들게 되고 고립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럽다. 어쩌면 돌봄 노동의 메커니즘의 핵심은 아픈 자의 고립을 막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면역 문제라고 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라’고도 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잘 삶’(well-being)에 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배우려고 한 적도 없었고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었다. 대도시에서 홀로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프리랜서 노동자가 잘 먹고, 잘 자고, 잘 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야근, 주말, 휴일 노동은 다반사다. 비대면 시대라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다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게 장점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어디든 일터가 됐다는 뜻이다. 집과 작업실의 구분이 모호하고 집 안 곳곳에 있는 디스플레이들이 내뿜는 빛과 소리가 일상의 고요를 방해한다. 일은 해도 해도 왜 끝이 없는가. 잠시 일을 멈추거나 쉴 만한 용기가 아직 내게는 없다. 그게 용기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그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기로 한다. 부끄럽지만, 2년여 만에 밥솥을 꺼냈다. 너무 방치했다. 집에서 밥 냄새가 난 게 언제였던가. 할 줄 아는 요리랄 게 없으니 우선 각종 야채 볶기와 찌기를 시도해봤다.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잠자리에 들려 한다. 되도록 자정을 넘기지 않았고 자리에 누우면 최대한 휴대폰을 하지 않으려 했다. 생전 안 챙기던 비타민, 유산균, 면역 강화제를 알아서 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파도 돈, 아프지 않으려고 해도 돈이었다. 아무튼, 돈 덕분인지 다행스럽게 조금씩 몸이 회복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잘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내 몸과 마음의 건강에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자족이 있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노오력’ 하는데도 다음 날 또 몸에 이상이 있으면 그것만큼 배신감이 밀려드는 일도 없다. 그냥 화가 난다. 조금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보자면 ‘이 모든 게 나를 알아가는 게 아니겠는가.’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위안을 삼는 것이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얼굴 없는 통증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규칙을 만들어 그것을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다. 성실한 생활인이 되기. 정말 어렵다.
몇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운전을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다. ‘뚜벅이’로 오래 살아왔고 걷는 것에는 자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젠 쉽지 않아졌다. 다리 수술 이후 회복기를 거치고 보니 그간 너무 내 발을 혹사한 게 아닌가 자책한다. 더 건강하게 잘 걷기 위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사륜의 세계에 입문했다. 자차를 마련할 형편까지는 못 되지만 운전은 할 줄 알아야지 싶다. 나이 들어도, 몸이 아파도 이동할 수 있으려면 가능한 방법들을 미리미리 찾아둬야 한다. 또 하나, 부산국제영화제 출장길에도 시도를 해볼 생각이다. 부산에 가면 늘 일만 하다 돌아왔다. 극장과 숙소를 오가기 바빴고 숨 돌릴 틈 없이 매일 영화 보고 창작자들과 만나고 관객들과 이야기했다. 올해는 좀 다르게 있다 돌아오고 싶다.
어떻게든 시간과 틈을 내려 한다. 꿈도 야무지다 싶지만 꿈이라도 꿔보자. 하나는 미술관 가보기. 좋은 것을 찾아 극장 아닌 다른 공간으로 가보려 한다. 마침 부산에서 박찬욱 감독님의 첫 번째 사진전도 열린다고 하니 이때다 싶다. 부산의 독립 서점도 둘러보려 한다. 아침 산책과 밤마실도 하면 좋겠다. 언급한 몇 가지 중 단 하나라도 하고 돌아온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거 같다. 온통 일로 점철된 생활에 잠깐의 환기가 필요하다. 일에 빼앗긴 마음의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발등에 뒀던 시선을 거둬 저 멀리까지 보내보자. 아등바등하는 것 대신 슬렁슬렁 걸어보자. 아니다. 이번에는 너무 걷지 않겠다. 대중교통도 열심히 이용하고 안 되면 택시도 타겠다!
그렇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 잠깐 다른 길로 들어서 본다. 늘상 하던 것 아닌 다른 것을 하려 한다. 나쁘지 않다. 어찌 됐든, 다른 의미로 올해 부산에서도 꽤 바쁠 거 같다.
글.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