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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29. 2021

어제는 울었어도 오늘은 맑으니까

수원 행궁동

스무 살 이후 거의 2년마다 이사를 다녔다. 한때는 꿈을 좇아 때로는 돈에 쫓겨 서울로, 안산으로, 김해로, 제주로 그리고 지금은 여기 수원에서 살고 있다. 인생이 늘 그랬듯 한순간 리듬이 깨지고 스텝이 꼬이면서 1~2년쯤 지낼 만한 거처를 급히 구해야 했고, 남편의 고향인 수원에 부랴부랴 집을 얻게 된 사연이다.

수원화성 가을 풍경

아주 낯선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냉큼 마음이 놓일 만큼 익숙하지도 않은 수원. 처음부터 체류 기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코로나19 확산과 거리두기로 집에 있는 날이 많아서일까. 수원에 살게 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수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입에 붙지 않고 어색하다. 전 세계 수많은 길들이 끊겨 모두가 발이 묶인 지금, 악착같이 발붙이고 살고 있는 곳에서 내내 붕 뜬 기분이라니.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시간을 ‘여행’이라고 우겨보면 어떨까 싶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고 하지 않던가.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보고 반해버린 곳에 여러 번 가는 걸 더 즐기는 편이다. 수원에서의 삶, 아니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다. 호수공원이 있는 광교, 칠보산이 있는 호매실, 시댁(?!)이 있는 조원동 등 가보니 좋았고, 좋으니 자꾸 기웃거리는 곳들 중에 행궁동을 빼놓을 수 없다.



그날의 커피는 뭉게구름 맛, 행리단길

행리단길의 상점들

행궁동 카페거리 일명 ‘행리단길’(서울 경리단길에서 따온 별칭)은 오래된 한옥과 양옥을 리모델링한 특색 있는 카페, 상점들이 즐비한 탓에 주로 서울의 ‘인사동’이나 ‘익선동’ 등에 비유되는 곳이다. 이거 또 괜히 흥행작에 억지로 끼워 파는 게 아닌가 싶은 삐딱한 생각이 들어도 한 바퀴만 둘러보면 왜 그렇게 엮였는지 금세 납득된다. 그렇다면 요즘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갬성적인’ 골목 상권, 흔하디 흔한 카페 거리와 뭐가 다를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행리단길

화성 성곽과 깍지 낀 채 이어지는 골목, 꼿꼿한 고집과 신념이 느껴지는 공방과 노포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을 어여삐 남겨둔 채 새롭게 움트는 이야기를 골목마다 폴폴 풍긴다. 고전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감성이 어설프게 ‘짬뽕’되지 않고 조화롭게 ‘블렌딩’된 분위기랄까.

행궁동 전경

건축 고도 제한 덕분에(?) 하늘을 가리는 고층 건물이 전혀 없어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불편한 좁은 골목을 지날 때도 마음이 좀처럼 일그러지지 않는다. 낮은 건물에서 빼꼼 내려다보는 더 낮은 집과 상점들도 하나같이 정겹고 귀엽다. 그리고 무엇보다, 햇살 너그러운 날 옥상이 있는 카페에 앉아 우유 거품 대신 하얀 구름이 동동 떠다니는 커피의 맛이란!

행리단길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지자체에서 나서서 ‘행리단길’이라 명명하며 상권 조성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 글쎄. 전국 팔도에 출몰하고 있는 ‘n리단길’ 열풍에 왠지 모를 씁쓸함과 헛웃음이 나오는 건 나뿐일까. 행리단길의 본래 이름이었다는 ‘행궁 윗마을’이나 공방거리로 나눠진 ‘행궁길’ 같은 기왓장처럼 묵직하고 둥그스름한 이름이 어울리고 또 그대로 충분하지 않나 싶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아무래도 나, 행리단길 많이 좋아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월에는 가을 소풍 

수원화성 성곽길과 방화수류정

수원화성 성곽길

방향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행궁동을 헤매다 보면 반드시 어느 순간 수원화성 성곽을 마주하게 된다.(아니라면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은 행궁동이 아니다) 화서문, 장안문, 팔달문를 지나 화성행궁으로 이어지는 약 5.7km의 ‘화성성곽길’은 수원화성은 물론 수원의 이목구비를 가만가만 살필 수 있는 훌륭한 걷기 코스 중 하나다.


정조의 갸륵한 효심과 강건한 열망으로 탄생한 ‘조선 성곽의 꽃’,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같은 비범한 배경을 읊어대지 않아도, 늘 걸을 때마다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길. 그리고 그 생각은 수원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에 다다를 때쯤 더욱 선명하게 발그레해진다.


방화수류정


여행이라는 여가 생활이 아직 곤란하고 난감한 일로 여겨지는 때이기에 한두 평짜리 돗자리를 들고 나서는 반나절의 소풍조차 철없는 욕심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치 꿈결에 훔쳐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방화수류정과 용연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풍’보다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수백 년에 걸쳐 오늘 날까지 마땅히 사랑받고 있는 작은 섬과 듬직한 성곽을 바라보는 하루. 공교롭게 소풍 가기 좋은 가을이고, 당신의 머릿속에 이미 어떤 얼굴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방화수류정

여행은 살아보는 것이라지만 삶은 살아내는 거라서 산책이나 소풍 같은 말랑한 이벤트로 결코 메울 수 없는 균열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틈새와 골절들만 들여다보며 하루를 또 전전긍긍 까먹을 수는 없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한다면 우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드는 게 먼저일 테니까. 꼭 행궁동이 아니더라도, 하필 날이 궂어도, 오늘 유난히 못난 얼굴이더라도 어제의 우는 얼굴은 아닐 수 있도록.



글 | 사진제공. 박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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