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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Nov 08. 2021

[사물과 사람] 바닷가

집에서 바다가 멀지 않다. 이스트본은 이름난 관광지는 아니지만, 여름 한철 바닷가는 관광객으로 제법 붐빈다.




황금색 둥근 지붕


이스트본 해안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물은 피어(Pier)다. 피어는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길게 설치된, 부두 같은 구조물이다. 이스트본 피어는 길이가 300미터쯤 된다. 갑판처럼 생긴 나무 바닥을 밟으며 수평선을 향해 가면 마치 바다 위를 걷는 것 같다. 피어 중앙에는 기념품 가게들과 찻집이 있고, 끝에는 지붕이 둥근 돔으로 된 메인 건물이 있다. 안에는 음식점과 클럽이 있다.


2016년 여름 이곳에 온 후 처음 바닷가에 나갔을 때,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피어의 황금색 돔 지붕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이 아니어서 낯설고 신기했다. 피어에는 황금색이 곳곳에 있었다. 오픈 데크 양 옆에 있는 가로등 기둥에는 황금색 사자가 도드라져 있었고, 찻집 ‘빅토리아 티룸’ 간판 글자도 금박이었다. 하긴 입구 간판에 새긴 글자도 금색이었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셰이크스피어(Sheikh’s Pier, 셰이크의 피어)”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비슷한 발음으로 말장난을 했지만, 이 간판은 피어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었다. 셰이크는 아랍 국가의 왕족, 부족장,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주인은, 바닷가에 호텔을 여러 개 가지고 있고, 금으로 도색한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사우디아라비아계 부호 아비드 굴자 씨다. 그는 자신을 셰이크라고 불렀다. 그가 2015년에 이 피어를 샀다.





역사적 건물의 외국인 주인


이스트본 피어는 1870년에 개장했다. 당시 이 지역 최대 영주였던 캐빈디시 공작이 설립을 주도했다. (이스트본에는 그의 이름을 딴 장소가 많다. 우리 아이들이 다닌 중학교 이름도 캐빈디시 스쿨이다.) 피어에는 전망대가, 극장이, 바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피어에도 기관총이 걸렸다. 데크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독일군의 공습과 해안 상륙을 저지했다. 이 바닷가 마을에서 피어는 지난 150년 동안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 지역의 중요한 장소로 남았다.


영국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이나 장소를 ‘등록건물(listed building)’로 지정한다. 등록건물이 되면, 작은 것이라도 함부로 바꿀 수 없다. 개보수하려면 반드시 시청 계획과의 사전 허락을 받아야 한다. 등록 등급은 중요한 순서대로 I급, II*급, II급으로 나누어지는데 이스트본 피어는 2009년에 등록단계가 II에서 II*로 상향되면서 ‘특별히 중요한 건물’이 되었다. 당시 문화부장관은 “이스트본 피어는 오랫동안 이 아름다운 해안도시에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 이 빅토리아시대 걸작품이 새로운 삶을 호흡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14년 여름, 화재가 발생했다. 피어 중앙에 있는 가게들이 다 타버렸다. 화재 후에 당시 소유주는 보험금을 챙긴 후 서둘러서 피어를 처분했다. 이를 셰이크가 매수했다. 정확한 매매가는 공표되지 않았지만, 100만 파운드(16억 원)도 안 되는 헐값이었다는 소문이 있다. (그 몇 해 전에 시장에 처음 나왔을 때 매물 가격은 550만 파운드였다)


여러모로 지역 주민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지역사회와 동고동락했던 역사적 건물이 헐값에 팔리다니. 그것도 무슬림 외국인에게. 더욱이 새 주인이 된 셰이크는 당장 ‘이스트본 피어’ 현판 대신 ‘셰이크스피어’라고 이름을 바꿔 달았고, 주 건물의 돔을 금색으로 칠했고 청동 사자도 금색을 입혔다. 피어는 등록건물이라, 이러한 변경을 하려면 시청에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허가도 받지 않고 맘대로 고쳤다. 지역 주민들은 화가 나서 시에 불법적 변경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내가 이곳에 온 2016년 여름에도 이 문제는 한창 논쟁 중이었다. 나는 시가 어떤 결론을 낼지가 궁금했다. 허락 없이 바꾼 것 자체가 불법이므로 원상 복구를 명하게 될까? 문화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며 (다소 낯설지만) 황금색 돔을 인정할까? 이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일어난다면, 한국에서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2016년 가을, 시는 분쟁이 일어난 지 1년 만에 이렇게 결론을 냈다. “지금까지 칠한 황금색은 그대로 유지해도 좋다. 하지만 더 이상은 칠하지 마라. 그리고 피어의 이름은 ‘이스트본 피어’로 다시 바꿔라.” 셰이크는 기뻐했고, 일부 주민들은 실망했다. 나는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시장의 물건


오랜만에 바닷가에 갔다. 겨울 문턱의 바닷가는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바닷가에 앉아 있으니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활력마저 뺏길 것 같다. 어젯밤 내린 비로 기온도 뚝 떨어졌다. 피어 지붕은 여전히 황금색으로 빛났다.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자꾸 보니 괜찮다. 흐릿한 태양에도 반짝거리는 게 회색 바닷가에 그나마 활기를 보태는 것 같다. 어쨌든 이 특이한 색깔 때문에 이스트본 피어는 브라이튼이나 헤이스팅스 같은 다른 바닷가 도시 피어와는 느낌이 다르다. 나름 흥미로운 스토리도 있다. 특별하다면 특별해졌다.





그런데 아쉬움도 있다. 이게 정말 이 도시의 역사를 함께한 소중한 장소라면 그걸 개인이 소유하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셰이크는 이스트본 피어를 산 직후, 이 피어는 사업이 아니라 개인적인 프라이드라고 했다. 이민자로 와서 피어까지 소유하게 된 자신이 자랑스러웠나 보다. 그는 2018년에는 인근 도시 헤이스팅스의 피어도 구입했다. 신문 기사를 보니 피어가 50만 파운드(8억 원) 매매가로 시장에 나왔을 때, 헤이스팅스 주민들은 이게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나 개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가열찬 모금 운동을 벌여 이를 지키려고 했단다. 십시일반으로 43만 파운드나 모았는데 겨우 7만 파운드가 모자라서 살 수가 없었단다. 결국 셰이크는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피어 두 개를 ‘소유’했다.


한국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지키려고 하는 마을의 유산을 시장에 내놓고 누구든 돈으로 살 수 있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 않을까? 나중에는 그렇게 될까? 아니, 이미 그런가?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 생각도 바람에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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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이향규


전문은 빅이슈 262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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