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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Nov 08. 2021

[CRITIC] 태풍이 지나가고

<오징어 게임>과 넷플릭스, 21세기 스튜디오 시스템의 재림


흥행 이유를 분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좋은 작품이 반드시 흥행하는 건 아니고, 반대로 흥행을 했다고 해서 꼭 훌륭한 만듦새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대중적인 성공과 작품의 완성도는 대체로 별개의 그래프를 따라 움직인다. 좋고 나쁨을 따지는 건 (객관을 가장한) 주관에 뿌리를 둔 질적 파단이고, 흥행은 명백한 수치적 결과다.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는 건 그야말로 유사 과학에 가깝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흥행과 작품성이 우연히 겹치거나 교차할 순 있어도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아무 관계가 없다. 이건 거의 '오징어 게임' 속 기훈(이정재)과 일남(오영수)의 사정만큼이나 동떨어진 이야기다. 얼핏 같은 공간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들의 동행.



©Netflix


흥행작의 업보, 의도를 초과해서 부여되는 의미


'오징어 게임'이 왜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켰는지, 어떻게 넷플릭스 전체 시청 1위를 차지했는지를 묻는다면 누구도 답을 할 수 없다. 모두가 나름의 논리로 지금의 현상을 설명하고 싶겠지만 어떤 통찰력을 발휘한다 해도 그건 수백만 가지 이유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멈추면 불안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게 자명하기에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처럼) 뭐라도 말하고 떠들어야 한다. 결국 '오징어 게임' 본편보다 재미있는 건 그 주변에 붙은 수많은 말과 생각, 욕망들이다. '오징어 게임'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확대 재생산하는 다양한 입들을 통해 '오징어 게임'은 본래 의도했던 것을 훌쩍 너머 거대한 의미로 확장되어가는 중이다. 의도를 초과하는 의미는 텍스트 바깥에서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지 못한 곳까지 데려가는 중이다. 마치 허리케인에 휩쓸려 미지의 세계 한가운데에 떨어졌던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처럼.



©Netflix


동시에 이러한 이유로 '오징어 게임'은 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기자 나부랭이에게까지 부당한 평가를 받을 상황에 이르렀다. 어쩌면 '오징어 게임'에 있어 (정작 그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을) 첫 번째 비극은 여기에 있다. 결코 위대한 적 없었고 비슷한 종류의 야심조차 부린 적 없건만 이제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대단한 작품이 되어야 하는(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아쉬움과 한계에 대한 지적은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오락을 목적으로 한 팝콘 무비의 연장에서 '오징어 게임'은 꽤 영리하고 때때로 준수한 방식으로 목적에 도달한다. 다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이 작품의 목적지가 한국 시청자, 잘해도 아시아권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오락물이었다는 점이다. 몇 가지로 단언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과 복잡한 현상의 결과로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인 흥행작으로 거듭난 시점에서 이 작품은 본래 의도와는 무관한 해석들을 부여받는다.



현상으로서의 '오징어 게임', 그리고 OTT 오리지널 콘텐츠들


'오징어 게임'의 전개는 단순하다. '배틀로얄'(2000), '카이지'(2009), '신이 말하는 대로'(2014) 등 일본에서 유행했던 ‘데스게임물’ 장르의 연장에서 보면 '오징어 게임'의 완성도는 상대적으로 미흡한 편이다. 여타 데스게임물은 설정된 게임에서 오는 쾌감, 퍼즐 같은 구성을 풀어가는 방식 그 자체에 집중한다. 갑자기 게임을 왜 해야 하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하선 크게 관심이 없다. 목숨을 걸고 잔혹한 게임을 즐긴다는 긴장감(혹은 무력감)이야말로 ‘데스게임물’이 쌓아올린 쾌감의 본질이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에서 게임이 해결되는 방식은 상당히 싱겁다. 한국에서 유년 시절 즐겨 하던 게임이라는, 이색적인 설정을 빼고 나면 아무도 게임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게임은 때때로 더 큰 폭력으로 해결되고 ‘게임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룰도 수시로 무너진다.


©Netflix


대신 '오징어 게임'은 게임의 헐거운 자리를 인물들의 사연으로 메운다. 게임이 주는 쾌감보다 인간적인 사연과 드라마에 공을 들이는 셈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K-신파가 해외에서 먹히는 거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데스게임물이 장르 공식을 ‘축소재생산’ 하면서 게임을 가볍고도 잔혹하게 풀어나갔다면 '오징어 게임'은 착상은 빌려오되 훨씬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 사회구조와 모순에 대한 풍자가 깃들어 있다는 설명이다. 그럴듯하다.


삶이 지루해진 최상류층 부자들의 유희로 마련된 ‘오징어 게임’의 사회 풍자적인 면모는 '기생충'의 연장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현실을 상징적으로 은유한 과장된 상황들은 이국적인 이미지와 맞물려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정서들을 자아낸다. 익숙한 듯 이색적인 볼거리라고 해도 좋겠다. 거기에 과히 어렵지 않은 메시지와 풍자적인 요소도 양념처럼 묻어 있어 소비적인 오락물 이상의 충족감도 안긴다. 장르 공식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헐거운 접근이지만 드라마가 강한 한국 콘텐츠 특유의 조합이 오히려 예상 밖의 시너지를 생산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Netflix


이 시점에서 '오징어 게임'은 잘 만든 콘텐츠인지 아닌지, 이른바 목적과 완성도라는 이름의 중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린다. 식상함으로 낙인찍혔던 한국 콘텐츠들의 강력한 신파마저 전혀 다른 지위를 부여받는 것이다. 애초에 타깃으로 삼았던 직접적인 소비자들, 그러니까 한국 콘텐츠에 익숙한 코어 소비자들 입장에서 '오징어 게임'은 데스게임이라는 외투만 빌려 입은 적당한 내용에 불과하다. 하지만 패턴에 길들지 않은 바깥에서는 도리어 신선하고 무게감까지 갖춘 조합으로 해석되기 시작한다. 가령 '부산행'을 두고 좀비물에 강한 드라마성을 부여해서 도리어 남달랐다고 받아들이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여기서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목적과 완성도에 따른 ‘평가’가 아니다. 어떤 패턴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방식이 새로 정립되는 현상 그 자체가 이야깃거리다. '오징어 게임'이 왜 흥행을 했는지 붙들고 늘어질 것이 아니라 '오징어 게임' 이후 세계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말해야 한다. 어쩌면 '오징어 게임'의 흥행은 1950년 이후 중지됐던 장르 메커니즘의 재시동을 예고하는 신호탄처럼 보인다.



©Netflix

'오징어 게임'은 게임 체인저다. 정확히는 의도와 무관하게 게임 체인저가 되어버렸다. '오징어 게임'의 전례 없는 흥행은 스토리텔링 영상 콘텐츠 산업의 판도와 패턴을 바꾸는 중이다. 이건 '기생충' 이전과 이후 할리우드 내 외화의 장벽을 낮춘 것과 일견 유사해 보이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통해 비영어권 작품들에게 닫혀 있던 인식을 확장시키는 첫 단추를 끼웠다. 굳이 구분하자면 비평적인 혹은 관객 측면에서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반면 '오징어 게임'의 사례는 좀 더 산업적인 맥락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북미 구독자들이 어째서 번거로운 자막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오징어 게임'을 시청하느냐를 물어도,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니 이유를 알아도 별 쓸모가 없다. '기생충'이나 BTS 등 K-콘텐츠가 장벽을 낮추는 데 상당 부분 일조했으리라 짐작하지만 그 실체를 증명하긴 어렵다.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중요한 건 그다음,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변화들이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들은 이제 '오징어 게임'으로 요약되는 대안적 모델을 경우의 수에 추가하는 중이다. 지역 제작 콘텐츠와 전 세계를 대상으로 공략하는 콘텐츠가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장벽을 서로 허물고 있다.



©Netflix

애초에 '오징어 게임'은 북미 시장, 나아가 전 세계 마켓을 대상으로 기획된 시리즈가 아니다. 자국 혹은 지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기획된 패키지 상품에 가깝다. 이 상품의 내용물에 적은 안내 문구는 다음과 같다. 익숙하되 새롭게.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80퍼센트 정도는 익숙한 것들로 구성하되 20프로는 새로운 요소들로 채울 것. 새로운 요소들을 제일 앞에 장식할 것’ 정도일까. 그동안 선보여온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들은 이러한 공식들을 축적 중이다. 첫째, 이미 검증된 장르 스타일의 도입. 가령 데스게임물은 아시아권에서 이미 검증된 패턴이며 '아리스 인 보더랜드'(2020)가 먼저 제작되기도 했다. 둘째, 인지도를 위해 자국의 인기 스타를 일부 고용하되 신선함을 더해줄 새로운 캐스팅에도 소홀하지 말 것. 제작 차원에서 이건 꽤 영리하고 유리한 접근이다. 영화와 같은 구매 모델이 아니라 구독 모델이라서 가능한 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셋째, 익숙함의 차원에선 철저히 장르적이되 거기에 변칙적인 요소를 부여할 것. 좀비물에 한국 사극을 더한 '킹덤'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완전히 새로운 상상력 따윈 없다. 차라리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이미 검증한 익숙함 80, 새로움 20의 공식을 철저하게 반복할 따름이다. 다만 새로움을 더욱 과감하게 시도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건 분명하다. 기존의 한국 영화, 드라마와 닮은 듯 새로운 '킹덤'이나 '오징어 게임'도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OTT는 스튜디오의 꿈을 꾸는가


익숙함과 새로움. 이것은 한때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의 대표 공식 중 하나였다. 스튜디오 시스템의 엔진이었던 장르가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장르는 어떻게 안착하는가. 제작사, 관객, 평단의 욕망이 하나의 고리를 형성할 때 특정 스타일과 반복되는 패턴은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한다. 제작사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흥행작의 패턴을 반복한다. 관객 역시 실패의 경험을 줄이기 위해 다수에 의해 검증된 재미를 선택한다. 마지막으로 평단이 실패를 줄이기 위해 반복되는 사례들을 묶어 이름을 붙이면 비로소 하나의 장르가 인식된다. 장르를 익숙함의 반복을 통해 리스크를 줄이고 새로운 요소를 투입, 일정 부분 변주하면서 생명력을 늘려나간다.





1950년대 이후 새로운 장르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은 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 둘째 작가의 탄생이다. 물론 이후로도 영화는 특정 양식들을 반복해왔다. 하지만 195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일시적으로 힘을 잃은 후 장르 앞에는 다른 이름들이 걸려왔다. 때론 시리즈와 속편. 이후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같은 프렌차이즈. 대체로는 감독의 이름. 특정 스타일과 패턴을 반복한다는 요소는 유지되지만 그 주체 앞에 스튜디오의 이름표는 희미해졌다. 그런데 최근 다시금 양상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다름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를 통해서 말이다.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는 본래 제작사가 아닌 플랫폼, 즉 광장의 역할임에도 각자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에 매진하는 건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인 결과다.


OTT 플랫폼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흔히 플랫폼이라고 하면 사람들을 모으는 기능적인 면모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플랫폼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정거장, 혹은 공간으로서의 위치 이상의 정체성이 필요하다. 비유하자면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다른 곳과 구분이 가능한, 깃발을 꽂는 작업이 요구된다. OTT 플랫폼이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오리지널 시리즈를 자체 제작하는 것은 이러한 깃발 세우기, 달리 말해 정체성을 소비자들에게 인지시키는 작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OTT 플랫폼의 핵심은 어떤 작품을 모았는지, 해당 플랫폼에 가면 어떤 작품을 볼 수 있는지에 달렸다. 다만 타 플랫폼과 구분되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저작권 등 비용 측면에서도 녹록지 않은 출혈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독점 스트리밍을 할 수 있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비축하고, 이를 관객에게 학습시키는 최선의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직접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이다. OTT 플랫폼들이 경쟁적으로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뛰어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은 단지 콘텐츠 확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1차적인 효과는 당연히 해당 콘텐츠를 보기 위해 소비자가 OTT를 구독하게 되는 유인 효과다. 이어지는 중요한 요소가 마케팅 효과다. 구독 경제 모델인 OTT 플랫폼의 입장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끝없이 제공해야 하는 건 필연이다. 이때 지속적인 콘텐츠 제공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오리지널 콘텐츠의 시리즈화다. 단편으로 끝나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소비자를 붙들어둘 수 있는 시리즈물, 또는 시즌제는 이제 OTT 플랫폼의 기본 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자연스럽게 이제는 개별 콘텐츠보다 각 플랫폼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시리즈를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플랫폼의 색깔을 결정짓는다. 단순히 많은 물량을 확보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플랫폼인지 ‘인지’시키는 작업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OTT 플랫폼들의 오리지널 콘텐츠 경쟁은 마치 20세기 초 장르가 탄생하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장르는 반복과 학습의 산물이다. 스튜디오가 패턴을 만들면 관객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하나의 이미지로 정착된다. 뮤지컬, 스크루블 코미디, 웨스턴 등 초기 할리우드의 장르들은 대개 이런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각 OTT 플랫폼들이 오리지널 콘텐츠를 통해 드러내는 정체성들은 20세기 초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자리 잡았던 방식과 유사하다. MGM의 뮤지컬,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호러 영화 등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각각의 색깔로 장르를 탄생시켰다. 마찬가지로 OTT 플랫폼이 지향하는 방향성은 오리지널 시리즈의 축적, 반복으로 결정된다. 하나의 플랫폼이라고 말은 쉽게 하지만 실은 각 지역마다의 장벽은 적지 않다. 문화적, 언어적 다양한 이유로 메인 스트림의 콘텐츠와 지역 콘텐츠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Netflix

'오징어 게임'은 거기에 거대한 균열을 낸 사건이다. 이제 단일 플랫폼 안에서는 더욱 과감하고 다채로운 도전이 이뤄질 것이 자명하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흥행의 결과로 이어지리라 장담할 순 없지만 결과물이 쌓이면 결국 하나의 장르로 안착하기 마련이다. 언젠가 시간이 지났을 때 넷플릭스를 대표하는 어떤 패턴이 장르가 된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다만 착각해선 안 되는 것이 장르는 언제나 평균의 미학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빼어난 독창성이나 완성도를 기대하는 건 흥행과 작품성을 일대일로 연결시키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장르는 언제나 익숙한 듯 조금 새롭게, 다수가 적당하게 만족할 수 있는 완성도를 추구한다. 여기에서 흥행하는 창작의 비밀을 찾으려 해도 헛수고다. 거기엔 잘 맞물려 돌아가는 생산 공정이 있을 뿐이다. '오징어 게임'의 앞에 감독이나 연출자의 이름보다 1950년대 이전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그러했듯 ‘출연 배우’와 제작사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이름표가 붙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비하의 의미가 아니다. 산업으로서의 영상 콘텐츠는 바로 이러한 합리적인 생산 공정의 결과물로서 우리의 여가 생활을 지탱한다. 바야흐로 OTT의 시대가 온다면, 아니 이미 왔다면 그 증거는 이러한 콘텐츠 평균의 성취가 얼마나 잘 쌓이고 인지되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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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경원(<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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