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예정일을 한 달 앞둔 7월의 아침, 속옷이 축축해진 걸 느끼고 평소보다 일찍 깼다. 임신 말기가 되자 아기가 커지며 방광을 짓눌러 요의를 자주 느꼈기에 처음에는 잠결에 소변을 보고 만 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리 사이에서 물이 콸콸 쏟아졌다. 식염수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책에서 읽은 정보대로 양수인 게 분명했다.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을 깨워 병원으로 출발했다. 양수가 터지면 48시간 내로 출산해야 한댔지. 대부분의 정보를 책으로 먼저 습득하는 게 습관화된 나 같은 사람들은 이런 경향이 있다. 어떤 정보값이 장소나 냄새, 목소리나 뉘앙스의 질감으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 글자로만 머릿속에 펼쳐지는 것.
오늘 중으로 아이를 만나겠구나 생각하며 병원에 도착하자 허리와 골반 부위가 급속도로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관장약을 주면서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했는데 ‘굴욕 3종 세트’라고 불리는 관장, 제모, 내진 중의 한 코스가 이제 시작되는 터였다. 그런데 나는 이 세 가지가 왜 굴욕적인지 잘 모르겠다. 간호사가 해주는 제모나 의사가 손을 넣어 확인하는 내진은 정신이 없어 굴욕이라 느낄 겨를이 없었다.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하는 관장은 아무렇지 않고 진통하다 변을 흘리는 게 진짜 굴욕이다. 물론 진통을 할 때 힘을 주다가 조금 흘리는 건 흔한 일이며, 의료진은 대수롭지 않게 쓱 닦아주고는 더 힘주라고 응원해준다. 나도 내가 흘릴 줄… 몰랐다. 진통을 한 지 열 시간 정도가 지나자 “95퍼센트 열렸어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라고 하던 의사가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더 기다리면 위험할 수 있어요. 긴급 수술 들어가요.” 간호사가 다가와 요도에 뭔가를 쑤셔 넣었다. “제왕절개 시에는 수술 전 소변줄을 삽입하게 되며 보통 1~2일간 사용하게 된다.” 책에서 본 문구가 또다시 떠올랐다.
엄마가 된 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이와 비슷한 출산 과정을 거친다. 한국인이라면 이후 몸조리 과정에 산후조리원의 여정이 추가된다. 출산 후 1주일 내로 병원을 나와 조리원에 2주 정도 있다가 정부에서 지원하는 산후도우미의 손길을 2주 정도 추가로 빌리는 것. 출산 후 한 달 정도는 모든 걸 새롭게 배우기에 급급했고 내내 어리둥절했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부풀어 있던 배가 쑥 들어가지 않는다’, ‘오로가 나오니 생리대를 한동안 착용해야 한다’ 등 내 몸에 나타난 변화는 책에서 본 내용의 적용이 쉬워 덜 당황스러웠지만 아이 돌봄에 대한 건 이론을 안다고 해서 바로 활용되는 게 아니었다. 아이를 어떻게 안는지, 울음마다의 의미는 어떻게 구분하는지, 목욕은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같은 건 눈과 손과 감으로 기억해두어야 했다. 에어컨을 켜놓고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족이 모여 작은 백일잔치를 했던 즈음부터는 엄마라는 역할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물론 적응하는 것과 편안해지는 것은 다르다. 아이는 생후 1년이 될 때까지 밤에도 세 시간에 한 번씩 깼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낮에도 머리가 맑지 않아 글을 쓰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책을 읽지도 못했다. 그때만큼 넷플릭스를 열심히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새로운 정보나 교양의 투입이 절실한데 집중력이 좀 떨어져도 습득 가능한 게 영상뿐이어서 그랬다.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 매운 것, 인스턴트 음식, 커피,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배가 고프지 않아도 영양소를 고려해 먹었으며 조금의 짬이 나면 아기 용품들을 검색하고 구매하는 데 시간을 썼다. 그렇게 휴대폰 속 사진보관함이 아이 사진과 영상으로 가득 차고 내 스케줄을 모두 아이에게 맞추는 일상에 익숙해지는 시기와 멍하니 있는 날들이 겹쳐졌다.
어느 겨울 밤, 나는 엄마들이 산후우울증을 왜 겪는지 알겠다며 남편에게 토로했다. 언제든 풀어헤쳐 젖을 먹일 수 있게 가슴 부분에 단추가 쪼르르 달린 원피스를 입고서였다
“나 요즘 자꾸 그 영화가 생각나. <아무르>라고, 알아? 첨 듣는다는 표정이네. 엄청 슬픈 이야긴데… 거기에 노부부가 주연으로 나오거든. 본 지 오래돼서 정확한 기억은 아닐 수도 있는데 처음에 영화가 시작할 때 그 노부부가 관객석에 앉아서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는 장면이 나와. 카메라가 처음에는 무대를 보여주다가 서서히 내려와서 노부부 얼굴을 비춰. 박수를 치고 있는 노부부가 젊었을 때는 그들도 무대에서 연주를 하던 사람이었다는 대사가 나오거든. 그 공연을 관람한 게 예전에 연주를 가르쳤던 후배들을 격려해주기 위해서였던 거지. 내가 요즘 왜 우울한지 생각해봤는데, 딱 그 박수 쳐주는 할머니가 된 기분이야. 예전에는 나도 무대 위에 있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연주를 보고 감탄해줄 일만 남았다는 서글픈 마음이 들어. 이게 어떤 기분인지 알겠어?”
“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봤어. 애초에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지.”
“난 언제나 조연이라고 생각했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한테 도움 주면서 사는 역할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아들로 살다가 남편으로, 아빠로 사는 게 딱히 희생이라고 보진 않아. 나한텐 나만의 인생, 이런 개념이 원래 없는 것 같아. 애초부터 박수 쳐주는 데 익숙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전에 법륜 스님의 책에서 본 표현이 생각났다. 나는 특별하고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샘솟는 거라고, 삶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으며 그저 자기를 길가에 난 풀처럼 여기라고. 길가에 난 풀처럼 그냥 살 때 오는 자유가 있다고. 남편은 언제나 자기가 다른 꽃을 더 돋보이게 하는 풀이라고 느껴왔기 때문에 새로운 꽃들이 나타나더라도 마음의 동요가 없다는 거였다.
그와 달리 나는 그런 풀이라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뭐가 될지는 아직 모르는 거라고 부풀리며 20대까지는 과잉된 자아로 살았고, 그게 무기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고민이 ‘나’로 시작하는 데에 치중해 있었고 글도 그랬다. ‘나는 이래야 하는데 억울해, 나는 이러고 싶은데 불행해.’라는 종류의 생각을 자주 했고 그 결핍을 원료로 오랫동안 뛰었다. 좌절도 그 때문에 격렬했지만 이전과 달라졌거나 성취한 것들이 그 덕이었다는 걸 안다.
더 이상 ‘수오엄마’나 ‘어머님’으로 불릴 때 놀라지 않는다. 그런 호칭들은 내게 말한다. 누군가를 보조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걸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선택한 자아의 종류마다 갈 수 있는 길이 이어지지 않게 달라지는데 특히 결혼이나 육아 같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선명했던 자아를 자꾸만 깎아내야 할 거라고. 누군가의 배우자나 부모가 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이라도 조명을 켠 듯 환하던 젊음이 해마다 채도를 낮춘 것처럼 바래가는 걸 피할 수 없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껴 나니 전에는 보지 못한 일과 하지 않은 일들이 보인다. 그렇게 서서히 멀어지자고 생각했다가도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데 집중하다가 글을 못 쓰면 어떻게 해? 글이라는 게 과잉된 에고와 현실의 격차와 좌절에서 나오는 거 아니었나? 너무 빨리 내려놓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걸 볼 때 즐겁게 박수 쳐주는 날이 늘고 있고 이 기분도 생각보다 괜찮기는 하다. 하지만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버려지진 않는다. 사실은 다들 그런 거 아닐까? 괜찮은 척하지만 실은 안 괜찮고 오락가락하는 거. 작아지는 데도 준비가 필요한 거였다니. 여전히 비대하거나 아예 사라지지 않으면서 적당히 옅은 상태로 오래 버티고 싶다.
글. 정문정 | 그림. 조예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