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하는 마음, 나누는 마음
은식이에게만 들을 수 있는 독창적인 이야기들이 있어요. 좋아하는 베개를 ‘그냥 베개’라고 부른 이야기, 그래서 할머니도 ‘그냥 할머니’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가장 먼저 생각나요. 은식이를 만나면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곤 했는데, 저는 그때마다 늘 아쉬웠어요. 유일무이한 은식이의 이야기를 제 귀와 마음에 더 많이 채우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은식이가 말하길 수집을 잘한다는 건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모으지만 거기에 욕심을 내지 않는 거래요.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에 욕심을 내는 순간,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오늘은 좋아하는 것들을 채우는 만큼 계속 비우는 은식이의 집으로 갑니다.
Q. 자기소개를 부탁해.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이야기를 계속 발견하고 만들고 싶은 호기심 많은 사람입니다. 호기심이 화폐라면 난 부자였을 거야. 자기소개는 보통 이름이나 학교, 나이 등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것들로 채우잖아. 그런데 나는 그런 객관적인 내용 대신, 왜 지금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마음가짐은 어떤지 이런 것들이 더 궁금하더라.
(* 은식이의 풍부한 자기소개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난 산책이 참 아름다운 행위라고 생각하며 즐기는 사람이야. 항상 주위에 시선이 열려 있어서 상대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고, 그만큼 나 스스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기도 해. 또, 눈가에 눈물점이 한 개만 있어도 잘 운다는 속설이 있는데 여러 개가 있어서 그런지 잘 우는, 남의 아픔도 내 아픔처럼 느끼는 사람이야. 키가 큰다는 속설 때문에 우유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우유부단하기도 하고, 남들은 웃기지 않은데 나만 웃긴 지점이 있어서, 개그 욕심은 없는데 이상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결국엔 내뱉고 마는 사람이야.
Q. 집에 책이 엄청나게 쌓여 있네!
내 방의 책들은 집에서 유일하게 내 것이라고 느끼는 것들이야. 엄마가 인테리어 권한의 100%를 갖고 계시거든.(웃음) 멋진 작품을 보면 꼭 갖고 싶어서 돈이 생길 때면 책부터 샀어.
Q. 곳곳에 액자와 사진들도 있네.
액자나 사진을 벽에 붙여놓으면 마음에 창이 하나 생겨. 그 창을 통해 어떤 기억이 떠오르고 세계가 확장되니까 빈 벽으로 두는 것보다 좋더라. 영화 포스터 수집에 빠졌을 때는 천장에도 붙였었는데, 작은 방이 무한히 확장되는 기분이 들어 좋았어. 외장하드 속 파일들처럼 만질 수 없는 것도 수집하고, 친구들이 준 선물이나 사진 등 추억이 담긴 물건을 모으면서 나만의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어.
Q. 수집하면서 좋았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야?
나는 그래픽 노블이 아주 예술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남해에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김한민 작가의 '비수기의 전문가들'이라는 그래픽 노블을 보고 충격적일 만큼 좋았어. 김한민이라는 사람을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에 그와 관련 있는 책들을 샀는데, 김한민 작가가 편집장일 때 발행한 '1/n'이라는 잡지를 꼭 읽어보고 싶은 거야. 한두 권은 중고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전권을 한꺼번에 구하기는 어려웠어. 거의 10년 전에 발행된 잡지여서 절판한 지 오래됐거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냈고, 시중에 판매하지 않고 창고에 남아 있던 재고를 받고 세상을 다 가진 듯이 기뻤어.
Q. 난처했던 순간도 있는지 궁금해.
수집가의 마음이 다 이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수집한 책을 나만의 분류법대로 보관하고 싶어. 그런데 지금 사는 집은 가족과 함께 쓰는 책장 이외에는 내 방밖에 책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거든. 공간이 부족하니까 어쩔 수 없이 분야가 다른 책들을 함께 보관하는데, 솔직히 참기 힘들어! 그래서 책을 여유 있게 둘 수 있는 집을 상상하곤 하지. 그러고 보니 부모님과 함께 사는 이 집을 항상 내가 있을 곳이라고 여겨서 수집을 할 수 있었네! 어른이 되고 이사를 해보니까 보통 큰일이 아니더라. 품이 많이 들어서 웬만하면 이사를 안 가고 싶어. 집을 자주 옮겨 다녔다면 수집가로 살기 힘들었을 거야.
Q. 불을 안 켜고 살아서 어둠의 자식이냐고 묻는 엄마에게 “엄마가 어둠 그 자체야.” 하고 장난을 쳤다며?(웃음)
엄마랑 전화도 수시로 하고 카톡으로 말장난도 자주 쳐.(웃음) 사실 우리 엄마는 흰색을 아주 좋아하시지. 거실도 전체적으로 흰색 계열이고, 주방의 식탁도 흰색이야. 생각해보니 이제껏 산 집의 벽지가 죄 흰색이어서 그런지 나중에 나도 집을 꾸밀 때 흰 벽지를 고를 것 같아.
Q. 어머니의 취향을 닮아가나 봐.
집 안 곳곳에 엄마의 취향이 담겨 있는데, 알게 모르게 내 일부가 돼. 일곱 살 때 엄마가 들려준 비틀스의 음악을 아직까지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야. 생각해보니 엄마도 수집을 하셨네. ‘엄마, 사랑해요.’라고 적은 엽서나 내가 처음 찍은 도장을 고이 모아놓으셨더라. 그리고 내가 네 살 때 “나중에 은식이 옷장 생기면 꼭 이 손잡이를 달아줘야겠다.” 하시며 보관한 문고리가 지금 내 옷장에 달려 있어. 또, 엄마가 마그넷을 좋아하셔서 여행 가면 항상 사 오시는데, 그 사실을 아는 가족과 내 친구들이 선물한 것도 다 모아두셨어. 미니언즈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친구들이 버거 세트를 먹고 사은품을 가져다주는 거랑 비슷하지.
Q. 외할머니의 영향도 느껴진다고 했지?
할머니는 항상 업보에 대해 이야기하셨어. 받은 만큼 돌려주고 돌려준 만큼 받게 되지만 절대로 돌려받을 생각으로 주면 안 된다고 하셨지. 엄마가 그 모습을 보고 자라셨겠지? 나도 엄마가 남들과 나누는 모습을 많이 봤었거든. 물건이 많으면 여러 나눔재단에 보내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셨는데,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기뻐하셨어. 나도 수집한 것들을 친구들에게 나눠 줄 때면 더없이 기뻐.
Q. 수집만큼 나눔도 잘하네.
다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서. 그래서 친구들과 책을 교환하며 읽기도 해. 또, 계속 채우려면 계속 비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집과 나눔을 반복하고 있어.
Q. 집이 생명체 같다고?
새하얗던 벽지에 조금씩 주름이 생기는 걸 보고 같이 늙어간다는 생각을 했어. 엄마는 도배를 새로 하고 싶어 하시는데, 나는 벽지가 누레지는 모습이 좋아. 같이 세월을 보내고, 같은 선상에 존재한다고 느끼거든. 최근 몹시 힘든 어느 날 집에 돌아왔을 때 방이 날 안아준다는 기분이 들어서 더 생명체 같다고 느꼈는데, 이건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라고 생각해.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에 따라서 살아 있는 생명도 무생물처럼 함부로 대하거나, 무생물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대하기도 하잖아. 차를 아끼는 사람들이 차에 별명을 붙이고, 좋은 엔진오일을 ‘먹인다’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집이 소중해서 생명체로 대하고 싶어.
Q. 집에서 보내는 일상 또한 ‘마음을 쓰는 일’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
주무시기 전에 항상 누룽지를 끓여 드시는 아빠를 위해 누룽지를 챙겨놓는다거나, 동생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사서 들어간다거나, 방에서 친구들을 생각한다거나, 영화나 책을 보며 웃거나 우는 등 집에서 보내는 일상은 모두 마음을 사용하는 일이 아닐까?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외할머니가 또 생각나. 할머니 댁에 가면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비결을 여쭤본 적이 있는데, 할머니께서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만든 음식은 맛이 없을 수가 없다고 하셨어. 그 순간을 절대 잊을 수 없어.
Q. 저번에 은식이가 만들어준 토마토 카레에 마음이 담겨 있었나 봐. 무척 맛있었어. 그러고 보니 너는 지도에 별을 표시하면서 맛집도 수집하잖아. 수집된 별들이 얼마나 많이 뻗어나갈지도 궁금하네.
음식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에 맛집을 수집하면서 지도에 별 표시를 하는데, 별의 세계를 넓히기보다 좁히고 싶어. 어느 식당에 가고 싶어서 메모를 해뒀다가 찾아갔는데 정작 그 집 음식이 내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는 거잖아. 우연히 낯선 곳의 다양한 메뉴 중에서 끌리는 걸 선택했는데, 너무 맛있어서 다시 가보고 싶다며 별을 새기는 게 이상적이야. 밤하늘에 별이 무수히 떠 있는 장면을 보았을 때는 늘 계획하지 않은 순간이었는데 참 좋았어. 마찬가지로, 우연적으로 나랑 연결되어 참 좋다고 느끼는 장소들을 내 집 근처에서 많이 발견하고 싶어. 좋아하는 것들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두고 싶으니까 말이야. 우리 동네, 내 집과 가까운 곳에 별천지가 펼쳐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독립한다면 재밌는 것들이 많은 서울 마포구로 가고 싶어.
Q. 그런데 독립하면 엄마가 쓸쓸해하실까 봐 걱정된다고?
고등학생 때 기숙 학원에서 두 달 동안 지낸 적이 있어. 엄마가 비어 있는 내 방을 보시곤 방이 너무 추워 보여서 사람의 온기가 있어야 할 것 같다며 내 방에서 주무셨대. 독립하고 싶다가도 그 일을 생각하면 엄마가 걱정돼. 20대 후반이니 부모님께 손 벌리면 안 되고 독립해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감이 있지만, 나이 들어서도 ‘엄마, 아빠’ 하며 같이 살고 싶은 마음도 있어. 나와 부모님을 위해서 나가 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나와 부모님을 위해서 이 집에서 계속 지내고 싶은 거지.
Q.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집을 쓰는 방법은 연필을 잡는 방식처럼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해. 집을 휴식의 공간으로 쓰는 친구의 집에 가본 적이 있는데, 내 공간이 아닌데도 참 편하더라. 집을 어떻게 쓰는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집은 어때야 한다는 틀이 있는 게 아니라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뻗어갈 수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매우 사적인 공간이지만 친구의 집을 구경하는 건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상대가 불편하지 않은 한 집에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해. 친구 간에도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이야. 오늘 인터뷰도 색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참 좋았어.
- 글. 손유희 | 사진. 이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