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일기(日記)를 옮긴다. 이것은 10월의 소소한 이야기. 누구에게는 하등 중요하지 않은 지극히 사적이고 사사로운 것들의 모음. 그러니, 슬며시 페이지를 넘겨도 괜찮다. 그러니, 조금은 너그러이 봐주시면 좋겠다. 청해본다.
10월의 마지막 날, 황정은 작가의 첫 산문집 <일기>를 읽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건강하시기를’ 책의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했다. 작가가 말하듯, 이 말은 분명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순진한 데다 공평하지 않은’ 면이 있다. 작가가 또 말하듯, 그럼에도, 그녀는 이 말을 ‘늘 마음을 담아 썼다.’고 했다. 누군가의 건강을 비는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언제부터였을까. 상대와의 대화 끝자락에, 문자와 메일의 마지막 문장에 나는 다음의 말들 가운데 하나를 고르거나 셋을 다 두고 가고 싶다. ‘건강하시길’, ‘무탈하시길’, ‘편안하시길’ 상대가 초면이거나 사무적 관계를 어그러뜨려 좋을 게 없다고 판단될 때가 아니라면, 여지없이 저 말들로 글을 맺곤 한다. 당신의 편안하고 무탈한 하루와 밤을, 건강한 일일과 연연을 바랐다. 저 말들은 상대를 향한 내 최소한의 성의였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마음이기도 했다. 다시, 쓴다.
몸에 찾아온 구체적인 통증과 직면하고, 돌봄과 의존의 문제를 고민해온 올 한 해, 나는 무사를 바랐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살아온 나는 퍽 운이 좋았다. 부끄럽지만, 어쩌면, 정말로, 살면서 처음으로 ‘별일 없이 사는 일’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딘가에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감사를 전하고 싶다. 몸과 마음을 압도하는 것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나를 본다. 그리고 다시, 황정은의 <일기>를 통해 나는 내가 느꼈던 감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무사를 바라는 이 마음에 도사리고 있을 불온한 반동의 기운을 읽는다.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보건의료계 노동자들과 휴업 상태에서도 매월 임대료를 감당해야 하는 자영업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은 2월 1일이고,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는 한파가 가장 심할 때부터 이어져온 청와대 앞 노숙 농성을 중단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 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p.41)
작가의 말이 너무도 정확해서 가만히 저 문장들을 다시 읽는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자꾸만 무사하고 싶다. 매일의 안녕과 평안 속에서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무사함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는 모두 무사하지 않으니까, 무사를 바랄 수밖에 없음을 안다. 다만, 무사를 향한 내 염원이 무사하지 않은 세상은 보고 싶지 않다거나, 그런 세상이라면 잊고 싶다는 걸 우회하는 길이라면 어떨까. 세상의 여러 국면과 면면 중 지극히 일부만을 보고 싶어 하는 나의 이기와 무심이 무탈이라는 그럴듯한 말의 탈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자꾸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을 때야말로 가장 위험한 반동과 보수의 길이 아닐까. ‘질식’이라는 작가의 비수 같은 말 앞에서 절로 가슴이 저릿해진다.
11월 1일, 아주 오랜만에 ‘다른 것’을 생각한다. ‘다른 것’이라면 이런 것.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것, 애초부터 내게 없었다는 듯 느껴지는 것, 이제 더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것. 이를테면, 지극한 사랑, 흥건한 취기, 무턱대고 갈구하던 재미,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시도했던 작당과 모의들. 그 모든 것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런 게 내게 있기는 했던가. 그 일부, 일 조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까무룩 잊고 살았던 ‘다른’ 감각이 <일기> 앞에서 미세하게 떨려온다.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p.160)
잃지 않기를.
잃지 않기를.
잃지 않기를.
10년째 같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을 지나, 또 그 순간들을 모른 척하며 여기까지 왔다. 관성과 타성이 슬그머니 내 옆자리에 와 있다. 무탈하고 싶은 마음을 의심해야 한다.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지만, 오늘 밤은 괜찮지 않다. “오직 도망치는 순간에만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파트릭 모디아노,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p.103) 도망, 표류, 배회라는 단어를 주섬주섬 꺼내본다. 11월의 첫 밤, 잠이 오지 않는다. 무탈하기 위해 떠나고 싶은 마음과 ‘다른 것’을 생각하는 밤이다. 이 시간이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지만, 더없이 귀하다. 앞서간 당신의 자취를 흠모하며, 나도 써볼 수 있을까.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에 이 밤의 기분과 감각을 잃지 않기를. 잊지 않기를.”
다시,
쓰기의 시간을
빈다.
- 글.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