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 주변 어른들이 주로 쓰던 경상도식 핀잔 중에 ‘포시랍다’는 표현이 있었다. 음식 투정을 하거나, 시키는 걸 하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면 어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래 포시라바서 어찌 살라 카는데?’ 표준어로 번역하면 ‘너는 그렇게 귀하게 자란 사람마냥 유약하게 굴어서 어쩌려고 그러니?’ 정도가 되겠다. 이기적이거나 빠릿빠릿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최대한 순화해서 사용하는 비난이었기 때문에 이 말을 듣는 사람은 흠칫 놀라며 “저 하나도 안 포시라운데요?” 같은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곤 했다.
‘포시랍다’는 말을 떠올리면 온 가족이 함께 보던 MBC 일일연속극 '보고 또 보고'에 관련된 기억이 이어진다. 임성한 작가가 쓰고 김지수, 정보석, 허준호, 윤해영이 주연으로 나온 이 드라마에서는 정보석, 허준호 형제와 결혼하게 된 윤해영, 김지수 자매의 맞사돈 관련 에피소드가 주로 나온다.
우리 가족 중에서 정식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저녁을 먹고 나면 엄마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금주와 은주 틀어라.” 거기 나오는 은주가 꼭 내 모습 같았다. 2녀 1남 중 차녀인 은주. 이름부터가 ‘금’이 아니고 ‘은’인 은주.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당장의 생활을 위해 간호사로 일하는 은주. 가만히 있어도 귀애받는 금주와 달리 애쓴 것의 반의반도 인정받지 못하는 은주. 사랑받아서 피해의식이 없고, 피해의식이 없어서 해맑고, 해맑으니까 누구든 사랑하는 금주. 언니만큼 사랑받고 싶었으나 사랑을 갈구하니 자꾸만 무리하고, 무리하니까 억척스럽고 그 억척이 만들어낸 그늘이 부담스러워 사랑하기 어려운 은주.
드라마 속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씬이 하나 있다. 시어머니에게 야채를 씻어두라는 말을 들은 금주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따뜻한 물로 야채를 하나하나 세척한다. 뒤늦게 그걸 본 은주가 황당해하며 야채를 온수로 씻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야채가 다 물러진다고 잔소리를 하는데 금주가 울상을 지으며 말한다. “찬물로 하면 손 시렵단 말이야…” 와. 어마어마하게 포시랍네.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그 장면이 어찌나 충격이었는지. 훗날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어떤 여성이 “저희 부모님은 제가 어릴 때부터 부엌에 못 들어가게 하셨어요. 부엌일을 잘하면 계속 살림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전 지금도 요리를 못해요.” 하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고 놀란 적 있다. 금주 같은 사람이 실제로도 있구나, 하면서.
오랫동안 그런 사람들을 불편해했다. 아침에 머리를 말리고 있으면 엄마가 자른 사과나 김에 싼 밥을 입에 넣어준다고 하는 아이들.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게 당연한 아이들. 아르바이트를 하다 손님에게 싫은 소리를 들으면 울어버리는 아이들, ‘저 돈 때문에 하는 거 아니거든요. 사회생활 경험해보려고 하는 거거든요.’ 같은 소리를 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과 있으면 화내야 할 때 둔감하거나 언제나 절박한 내 상황이 비교돼 짜증이 났다. 손님이나 직원의 말에 이토록 모욕적인 언사는 처음 들어본다고 놀라는 아이들, 알바비 좀 늦게 나와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아이들. ‘귀하게’ 커서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 ‘쓸데없이 예민한’ 아이들….
잊고 있던 ‘포시랍다’는 표현을 다시 떠올린 건 육아를 하면서였다. 엄마가 된 나에게 사람들이 종종 물어보곤 했다.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어?”라고.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귀하게 키울 거야. 사랑을 많이 받으면 유약해지는 게 아니라 내면의 중심이 단단해지는 것 같아. 남과 비교를 덜 하게 되고.” 그리고 나는 농담 섞인 이야기를 덧붙인다. “부모에게 사랑을 못 받으면 나중에 누가 조금만 관심을 줘도 바로 사랑에 빠져버린단 말이야. 대우받는 기준을 부모가 높여놔야 커서 함부로 감격 안 해.” 그런 식의 대답을 하면서 스스로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아이의 성향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들이 과거에 미워하던 사람들의 특성이었다는 것을.
누가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바로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오래전 내 모습이었다. 내가 좋아해서 만나게 되는 게 아니라 날 좋아한다고 하면 감동해서 사귀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때릴 땐 화나면 그럴 수 있다 이해해주었다. 포시라운 여자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내내 조심했다. 침대 컨디션에 예민한 스타일임에도 여행을 갈 땐 말 그대로 ‘잠만 자는’ 수준의 너절함도 겉으로는 괜찮아하며 밤을 새웠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다가 ‘왜 이제야 왔느냐.’는 의사의 책망을 듣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속내를 잘 말하지 않다가 의뭉스럽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여러 번이다. 털털한 사람으로 보이려다 내가 자꾸만 스스로를 하녀 취급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하녀 취급하니 나를 부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냄새를 맡고 곁에 다가왔다.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 같고 불행한 경험들이 자꾸만 이어지면서 ‘포시랍다’는 비난 자체가, 그런 비난을 하는 맥락 자체가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임을 알게 되었다. ‘참아라, 순종해라, 무던해라. 그래야 사랑받는다.’ 부당한 일에 싫다고 말하고 불편하다고 말하고 기분 나쁘다고 말하면서 이런 대접을 참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 ‘포시랍다’는 비난이었다. 돌이켜보니 공주님인 척하는 사람이 될까 봐 경계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공주 대접을 받고 싶었다. “괜찮아요”라는 말은 줄이고 “싫어요” “못해요” 같은 말을 늘리는 연습을 더듬더듬 해나가며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원래부터 하녀가 아닐 수도 있다고. 남에게 존중받는 것에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비슷한 시기에 황인숙의 시 '나의 맹세'를 처음 보았던 날이 떠오른다. 한 번 보고 놀라서 불경 낭독을 하듯 오랜 시간 공들여 천천히 반복해서 읽고 또 읽다가 너무 깊이 몰입해 얼굴이 시뻘개졌었지. 그렇지, 그런 거라면 역시 나도 아씨가 체질이었다.
나는 역경을, 불운을, 고통을
따뜻이 영접하지 않겠다.
울음소리로 미루어
까마귀는 참 속 깊은 새인 듯싶기도 하지만.
아, 비천하게도 나는, 아씨 체질인 것이다.
처지는 비록
아씨를 모셔도 시원치 않을지라도.
글. 정문정 | 그림. 조예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