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Dec 21. 2021

[사물과 사람] 밤길 운전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 있다. 운전도 그렇다. 영국에 온 후에는 좀처럼 하지 않았다. 주행 방향이 반대인 것은 차라리 괜찮은데, 출구가 사방팔방으로 열린 회전 교차로를 신호 없이 알아서 타고 들어가고, 1차선 국도를 시속 60마일(96㎞)로 달리고, 여기저기 일방통행로 표시가 붙어 있는 좁고 구부러진 골목길을 가는 일은 자신이 없다. 다행히 지난 몇 년 동안 일상은 몹시 단조로워서 차를 몰 일이 거의 없었다. 가게든, 바닷가든, 병원이든, 성당이든 3~40분이면 다 걸어갈 수 있었다.


런던한겨레학교 일을 맡으면서 토요일마다 런던에 가야 한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70마일(112㎞)이다. 기차를 탈 수 있지만 운행이 불규칙하다. 주중에는 한 번만 환승하면 되는데 주말에는 서너 번씩 갈아타야 한다. 기차를 타기에는 매번 보따리가 너무 무겁다. 할 수 없이 자동차에 짐을 실으면서, 갈 길을 걱정한다. 아니, 돌아오는 게 더 걱정이다. 수업이 끝나고 마무리를 하면 6시가 넘는다. 한국에서 6시면 초저녁인데, 이곳은 이미 한밤중이다. 위도가 높으면 여름 해가 길고 겨울밤이 빨리 온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서울은 북위 37.5도, 런던은 북위 51.5도에 있다.) 꽉 찬 어둠을 뚫고 돌아와야 할 길이 멀다.


가로등

가로등이 없다. 고속도로에도 가로등 없는 구간이 많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다른 운전자들은 쌩쌩 잘도 달린다. 고속도로의 제한속도 70마일을 겨우 맞춰도 다들 나를 앞지른다. 그들은 고양이 눈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나는 무리에서 뒤처지면서 자주 어둠 속에 혼자 남는다. 불빛 하나 없는 길을 눈을 부릅뜨고 가다가 가로등을 만나면 한숨 돌리게 된다. 잔뜩 올라갔던 어깨와 팔도 비로소 풀린다. 드문드문 있는 희미한 등이 이리 고마울 수 없다.


캄캄한 도로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내가 오랫동안 서울 근방에서 운전했기 때문일 거다. 그곳은 한밤중에도 늘 환했다. 가로등은 흔했고 다른 차량도 많았다. 밤길 운전이 피로한 것은 어둠 때문이 아니라, 불빛 때문이었다. 사람에게도, 차에도, 불빛 공해에도 부대끼는 것이 싫었는데 지금은 되레 그게 그립다. 그때는, 무섭지 않았다.


다른 차들

고속도로에는 추월 차선이 있으니 다른 차가 나를 앞질러 갈 수 있지만, 1차선 국도를 타면 사정이 다르다. 내 뒤의 차량은 내 속도에 맞춰야 한다. 우리 집에 가려면 구불구불한 좁은 고개를 여럿 넘어야 한다. 깜깜한 밤에 그런 길을 시속 60마일(거의 100㎞)로 달리는 것은 어렵다. 내 뒤로 멀리 차가 보이면 벌써 부담이다. 내가 민폐를 끼칠 것 같다. 뒤차가 아직 멀리 있는데도 나는 벌써 비난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이것도 병이다.


천천히 가는 앞차라도 있으면 한결 안심이다. 교차로에서 내 앞으로 차가 들어오면 반갑다. 그 차가 속도를 내면 그걸 쫓아가려고 애쓰다가 결국 다시 혼자가 되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내 속도와 맞아서 한참을 같이 가면 믿음직한 선배라도 만난 기분이 된다. 앞차의 빨간색 후미등을 안심하고 따라가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우회전 깜빡이라도 켜지면, 그리 섭섭할 수가 없다. 다시 혼자 남는다.


뒤로 보이는 차가 멀찍이 떨어져서 내 차와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면 이 또한 반갑다. 왠지 친절한 사람이 타고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나처럼 밤길 운전이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내가 앞차이다. 천천히 가는 앞차를 길잡이로 삼아 따라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거다. 갈림길에서 각자 갈 길을 갈 때까지 서로에게 의지한다. 길잡이가 되어주는 앞차와 재촉하지 않고 따르는 뒤차가 있으면 밤길 운전도 할 만하다.


헤드라이트

전조등이 비추는 고작 몇 미터가 내가 볼 수 있는 전부이다. 익숙한 길은 대강 경로를 짐작할 수 있지만, 초행길은 그 미지의 어둠이 다 불길하다. 나는 겁이 많다. 주말에는 도로 공사가 많다. 회전 교차로가 보수 중이면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내가 빠져나가야 하는 길목에 덜컥 ‘도로폐쇄’ 표지가 있으면 낭패다. 다른 출구로 나가지만, 그게 어떤 길로 이어지는지를 모른다.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새로운 경로를 믿고 더듬더듬 간다. 누가 그랬다. 길을 잃었을 때 필요한 것은 지도가 아니라 나침반이라고. 나는 남쪽으로 가야 한다. 방향을 잃지 않으면 시간이 걸려도 결국 집에 도착할 거다.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전체 그림을 다 보고, 정교한 지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지금 전조등이 비추는 만큼만 겨우 보이는 길을 여행하고 있다. 그래도 이 미지가 예전만큼 불안하지는 않다. 모르는 게 당연한 거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길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적어졌다. 어차피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방향만 잃지 않으면, 시간이 한참 걸리더라도, 결국 집에 닿을 것이다. 고맙게도 헤드라이트가 있으니 당장 눈앞이 캄캄한 것도 아니다.


동행자

밤길 운전에 말벗이 되어주는 이가 같이 타고 있으면 한결 안심이다. 그가 길눈까지 밝아서 가야 할 길을 착착 일러주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 특히 처음 보는 회전 교차로에서 어떤 출구로 나가야 할지는 옆에 있는 사람이 표지판을 재빨리 읽고 알려주면 한결 편하다.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사람도 고맙지만, 길을 잃었을 때 용기를 주는 사람도 귀하다. 오래전 일이다. 여덟 살, 여섯 살 된 아이들을 태우고 친정에 가는 길이었다. 갓 조성된 신도시는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진입을 잘못하는 바람에 엉뚱하게 공사장을 지나 산길로 향했다. 도로도 끊기고, 내비게이션도 길을 못 찾고, 주변에 사람도 없고, 날도 저물었다. “망한 것 같아. 길을 잘못 들었어.” 혼잣말인지 푸념인지 의논인지 모를 말이 한숨과 같이 나왔다. 차를 돌려서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여전히 갈림길도 많고 헷갈렸다. 불안했다. 그때 큰아이가 말했다. “엄마, 여기 맞아. 나 여기 와봤어. 이 길로 가면 돼. 기억나.” 나도 처음인 그 길을 와봤을 리 만무한데 아이는 마치 아는 길인 양 말했다. 작은 아이도 거들었다. “맞아 맞아. 나도 여기 알아. 이 길이 맞아.” 아이들은 헤매는 나에게 연신 맞다고 해주었다. 결국 한참 만에 길을 찾았다. 아이들은 기뻐했다. “거봐, 맞잖아!”


2021년이 저문다. 코로나19는 끊임없이 변이 바이러스를 만들어내면서 사라지지 않는다. 밤은 길고 장거리 운전은 지친다. 그래도 결국 우리 모두 머지않아 집에 닿을 것이다. 그때까지 무사하시길, 그리고 당신이 지금 좋은 사람과 동행하시길 빕니다.


글. 이향규 | 그림. 이애린


이번 호를 끝으로 '사물과 사람'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이 코너를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녹색빛] 살아갈 권리, 날아갈 자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