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Jan 11. 2022

[미식탐정] 겨울 바다가 만든 백합탕

작은 모텔로 숙소를 잡았다. 지방으로 출장을 다니면 여러 군상의 숙박업소를 다니는 것도 하나의 재미인데, 이번 숙소는 생각 이상으로 낙후된 시설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 격포항 바로 앞에 있어서 겨울 바다의 바람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동네 주민들의 싸움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숙소 앞에는 전라도의 손맛을 깊게 품은 식당들이 모여 있었다. 반찬들은 젓갈의 향취가 진했고 부안의 백합은 유난히 싱싱했다.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늦은 새벽까지 계속됐다.  

첫 부안 출장이었다. 변산반도는 숱하게 지났는데 숙소를 잡은 건 처음이었다. 보통 업의 특성상 출장을 가는 일은 촬영이 잡혀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프로젝트는 조금 더 난이도가 있는 사극 촬영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사극을 찍을 수 있는 궁 세트장은 그리 많지 않았고, 문경을 포함한 세 곳 정도를 논의하다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부안으로 가게 됐다. 

늦은 오후에 세트장에 도착하여 준비된 사항들을 확인하고 짐을 챙겨 숙소로 갔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허기가 밀려왔다. 점심 식사로 휴게소에서 간단히 요기만 한 상황이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스태프들과 함께 크지 않은 시내를 돌았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6인 이상 집합 금지 상황이라 삼삼오오 흩어져 식당을 찾았다. 선택권은 없었다. 바로 앞에 있는 중식당은 이른 시각임에도 문을 닫았고 옆집인 한정식 집도 곧 영업을 마무리한다고 했다. 결국 영업을 가장 오래할 것 같은 횟집에 부탁을 해 인원수대로 칼국수를 부탁했다. 깊은 허기가 맛을 잠식한 상황이라 허겁지겁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우려했던 첫 촬영이 마무리될 즈음, 서울에서 응원 차 내려오기로 한 친구가 도착했다. 생각 이상으로 진행이 순조로웠던 탓에 마음은 가벼웠다. 보통은 영상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각자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서로에게 힘을 주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조촐한 술자리를 갖는다. 삼삼오오 술을 마시다 인원이 늘어나고 결국 한 방에서 여러 스태프들이 함께 잔을 기울이며 당일의 촬영에 대한 노고를 푼다. 

오랜 친구가 먼 길을 찾아오니 반가움이 더했다. 급하게 짐을 풀고 숙소 앞 식당 골목으로 향했다. 촬영 내내 따뜻했던 바람이 저녁이 되니 금세 날카로워졌다. 격포항의 바람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곳에는 횟집이 많이 있었다. 여러 가게를 지나 미리 봐둔 곳으로 향했다. 낯선 곳에서 식당을 찾을 때는 간판이나 블로그의 사진으로 판가름하기 힘들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같이 작업을 하는 베테랑 스태프들의 말을 들으면 실패할 확률이 없다. 군산식당은 이곳에 자주 출장을 온 실장님이 추천한 식당이었다.

부안은 예로부터 백합의 산지로 이름이 높다. 백합은 조개의 여왕이라 불리며 조선 시대 왕실에 진상하던 식재료다. 서해를 품은 부안은 갯벌의 염도가 적당하고 모래펄이 고와 백합의 서식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고 섬이 육지가 되면서 백합도 자취를 감췄다고 했다. 

백합 요리를 내는 식당은 전통을 유지하면서 아직 성업 중이다. 부안 시내 곳곳에 백합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식당이 많다. 백합정식을 시키자 반찬이 하나, 둘 깔리기 시작했다. 전라도에서 먹는 반찬은 실패한 적이 없다. 김치와 젓갈이 소주와 함께 긴 여정의 시작을 알렸다. 백합찜과 탕이 먼저 상에 올랐다. 백합은 다른 조개보다 깊은 시원함을 가지고 있다. 물이 끓으면서 뱉어내는 백합의 뽀얀 국물에 의해 육수는 침잠했다. 백합에 남은 바닷물이 간간하게 조미료 역할을 하고 칼칼한 고추가 맛의 방향을 잡아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었다. 백합찜은 솥에서 찌듯이 굽는다. 적당한 불에서 은은하게 구워서 시간이 지나도 식감이 쫄깃하고 속살은 부드럽다.

백합죽은 화룡점정이다. 발라낸 백합 살에 녹두, 쌀을 함께 불려 각종 채소와 함께 끓였는데 풍미가 은은하면서 속을 차분히 달래준다. 쉽게 먹히는 죽인데 여운은 제법 길다. 죽 그릇을 비우려는 찰나에 서비스라며 칼국수가 나온다. 백합탕 국물에 푸짐하게 국수가 들어 있었다. 끈적한 면발이 입술을 스치며 백합의 풍미로 입을 물들였다. 푸근한 인상의 주인아주머니는 새로 만든 반찬이라며 안주도 꾸준히 챙겨주셨다. 

가게는 생각보다 빨리 문을 닫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짧은 시간 안에 꽤 많은 소주를 마시고 나왔다. 낯선 곳에서 하는 식사는 그 여정의 인상을 결정한다. 들어가기 전보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불었지만 속은 깊이 따뜻했다.  


군산식당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항길 16

08:30~20:00 매일 영업


글, 사진/ 미식탐정 (blog.naver.com/tastesherlok)

매거진의 이전글 사업하는 인문학, 걱정 마 길은 반드시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