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탱고를 시작했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 테다). 탱고를 시작한 지 2년 남짓인 것이다. ‘탱고 애송이’에 불과한 내가 탱고에 대한 글을 연재해도 될까? 다소 위축된다.
탱고를 배우며 탱고를 굉장히 진지하게 대하는 한국인이 많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탱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쓰는 시”, “하나의 심장, 네 개의 다리”, “탱고는 인생과 같다” 등 ‘탱고 명언’들을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힘주어 말할 때, 몸에 닭살 돋은 것처럼 간지러운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뭘 또 그렇게까지?’, ‘여러 취미 중 하나인데 그 정도까지 진지해야 해?’와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이런 마음가짐이 드러났나 보다. 누군가 언짢음을 표출한 적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랬다고 들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게 화를 낸 사람의 말을 요약해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탱고가 장난이야? 어?”
장난 아닌 탱고
여러 사람에게 개방된 공개 연습실이었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더 초보였고, 함께 추는 파트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우리 둘 다 흥이 많은 성격이다. 나오는 음악을 경쟁이라도 하듯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하필 그 음악에 흥이 넘쳤고, 둘 다 탱고의 근본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마음만 앞섰던 것이다. 그 꼴을 보는 입장에서는 ‘이 녀석들이 장난치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었겠다. 그러는 게 보기 언짢던 누군가가 내 파트너에게 넌지시 일렀고, 파트너는 자중하자는 취지로 내게 그 사실을 전했다. 그러면… 안 보면 되잖아요…. 그냥 자기 할 거에 집중하면 되지 않나? 굳이 관찰한 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왜? 당시에는 반감이 앞섰다.
이제는 그를 이해할 것 같다. 그렇게 진중하며 다소 엄격한 태도가 내가 매력을 느끼는 탱고의 특성과 닿아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탱고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안고 함께 걷는 춤이다. 서로 몸을 밀착하다 보니 탱고를 추며 상대방의 숨결이나 체취(개인적으로 코로나 시대에 탱고를 추는 데에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스크가 막아주는 것들이 있다), 힘의 세기 등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거칠게 발을 디디면 상대방의 상체까지 충격이 전해진다.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몸이 경직된 사람과 함께 추고 나면, 나 역시 몸 여기저기가 뻐근해진다. 그런 경험을 하니 ‘나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불편을 주지 않았을까?’ 돌아보게 됐고, 상대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단련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상대가 내게 집중하고 있는지 여부도 선명히 느껴진다. 서로 집중해 하나가 되어 움직인 시간 뒤에는, 따듯하게 위로받은 느낌과 만족감이 남는다. 상대가 몸으로 건네는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성의 있게 답하기 위해, 그러니까 좋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역시 진중한 배려심이 필요하다.
탱고를 즐기는 공간인 ‘밀롱가’에서 다른 사람과 춤을 출 때, 한번 같이 추기 시작하면 보통 세 곡에서 네 곡 내내 함께 한다. 중간에 그만두자고 말하면 상대에게 상처를 주므로 결례라고 배웠다. 잘 맞지 않고 불편할 사람은 미리 알아보고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탱고 문화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는(때로는 ‘감시’라고까지 느껴지는) 눈이 발달된 것은 이런 이유와 관계돼 보인다.
또한 탱고는 소셜 댄스다.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흐름을 공유한다. 같이 춤을 추는 한 사람뿐만 아니라 공간을 공유하는 다수의 사람들도 배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커뮤니티 문화에서 부정적인 평판이 형성되면 결국 고독해진다. 실력 있는 이들로부터 번번이 외면받고 퇴짜당하며 ‘흑화’하거나 ‘초급킬러(자신의 평판을 모르는 초보들에게 접근해 그들이 아예 탱고에 학을 떼게 만들어 쫓아버린다)’로 전락한 사람을 몇 알고 있다.
힙합도 좋아하는데요
하지만 때론 이런 ‘진중함’과 집단주의적 문화가 갑갑하다. 힙합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탱고를 춘 지 2년 남짓이지만 힙합을 좋아한 지는 20년이 넘었다. 아직 힙합의 반항심이나 분방함 같은 것들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나 보다. 배려심이 중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지나치게 ‘한국적인’ 예의를 강조하는 사람을 볼 때는 ‘이거 유교탱고 아니냐? 탱고의 본고장 아르헨티나에서도 이럴까?’라는 반항심이 꿈틀댄다(아직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보지 못했는데, 언젠가 경험해보고 진실을 밝히겠다).
또한 탱고 수업이나 동호회 활동을 위해 개설된 단체 채팅방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사사로운 소재를 지나치게 친근한 말투로 시도 때도 없이 내던질 때(심지어 그중에는 가짜뉴스도 있었다), 불쾌해진다. 어떤 어르신이 거의 매일 셀카를 투척할 때는 불쾌감을 넘어 분노까지 느꼈다. 소셜 미디어에 ‘친구공개’로나 올릴 것이지 특정 목적으로 불특정 다수가 모인 채팅방에 셀카를 올린다고? 이 근본 없는 자기애는 뭐지? 술자리에서 성차별적 언어와 편견 깃든 발언을 듣고 눈살 찌푸린 적도 있다.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가운뎃손가락을 올려버리고 말았는데….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기겁했고 나에 대해 안 좋게 말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안다, 내가 잘못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힙합 좋아하는 젊은이였다면 웃어 넘겨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연재를 시작했다. 탱고계에 더 많은 젊은이가 유입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단 몇 명의 젊은이라도 이 글을 읽고 탱고를 시작한다면, 몹시 기쁘고 뿌듯할 것이다(참고로 탱고판에서는 40대까지도 젊은이로 쳐주는 분위기가 있다). 젊은이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한국인들이 탱고의 매력에 빠져들어 이 판의 다양성이 증대되고 융성해지길 희망한다. 이런 마음으로 쓰는 글을, 진지한 탱고인 분들도 너른 마음으로 봐주시길 바란다.
글/ 최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