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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r 29. 2022

어려운 정의, 쉬운 정의

“‘배움과 실천’, 정의가 무엇인지를 배워서 행하는 일, 생각해보면 참 까다롭다. 하지만 그 까다로움을 인정해야 공동체가 평화롭다. 어려운 정의를 쉽다고 속이는 세상에선 폭력의 족쇄가 풀린다. 물론, 이는 평화가 유지되는 동안에만 통하는 이야기다. 어려운 정의를 어렵게 공부하며 유지한 평화가 깨진 뒤의 정의는 결코 어렵지 않다. 폭력으로 생명을 짓밟는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히 맞서야 한다. 갓 걸음마를 뗀 아이도 몸으로 알고 있는, 아무런 공부 없이도 깨닫는, 아주 쉽지만 정의로운 길이다.”


‘앎과 실천’, 혹은 ‘배움과 실천’. 자주 만나는 표어인데, 볼 때마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우리가 학교에서 가장 긴 시간을 들여 배운 것들, 예컨대 문법에 어긋나지 않는 영어 표현을 고르는 요령, 혹은 미분과 적분 개념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법, 물리현상과 화학반응에 대한 지식 등은 대체 어떻게 실천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배운 지식 대부분은 실천보다는 활용이나 응용 등의 표현과 어울리는 것 아닌가. 

물론, 이 표어 속의 배움과 앎이 지식 일반에 대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혹은 무엇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인지 등에 대한 배움과 앎이다. 사람은 무엇이 정의(正義)인지 알아야 하고, 알았으면 실천해야 한다는 게 이 표어의 뜻일 테다. 

어릴 때는 그래도 헷갈렸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정의롭지 않은 길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나. 초등학교 저학년만 돼도 다 아는 것들 아닌가. 그런데 굳이 표어까지 써서 붙이며 ‘배워야 한다’, ‘알아야 한다’라고 강조할 필요가 있나. 

ⓒUnsplash

이런 의문은 나이를 먹고 나서야 조금 풀렸다. 무엇이 옳은지를 안다는 것은 실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끄는 드라마 〈소년심판〉을 보면, 소년범죄에 대해 다른 입장을 지닌 두 판사가 나온다. 만14세 미만 촉법 소년에 대한 엄벌주의적인 입장을 지닌 판사와 그렇지 않은 판사. 이 가운데 한쪽 입장에 공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두 판사의 입장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해 판단하고 자기 입장을 밝히는 일은 아주 어렵다. 상당한 공부가 필요하다. 이런 사례가 아주 흔하다.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DNA를 자르고 붙여서 편집할 수 있게끔 하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이 최근 등장했다. 이 기술의 사용을 광범위하게 허용하는 일은 옳은가, 그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정의로운 입장을 취하려면,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교양이 필수적이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을 둘러싼 복잡한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공동체 구성원 다수가 지지하는 입장이 꼭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낯선 이에 대한 차별을 원하는 이가 많다고 해서, 차별이 정의로울 수는 없다. 물론 외로운 소수가 지지하는 입장 역시 꼭 정의롭다는 법은 없다. 다수결로도 확인할 수 없는 정의를 알아내고, 설득하는 수단은 결국 차가운 사실에 바탕 한 지식과 논리다. 요컨대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아주 많은 지식을 배워야 한다. 일상생활이나 훗날의 밥벌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에도 학교가 긴 시간을 할애하는 까닭은 어쩌면 그런 것이다. 

길고 복잡한 공부와 고민을 생략하고서도, 옳고 그름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는 이들도 종종 있다. 이런 믿음은 너무 쉬운 선악 구분으로 이어진다. 정의감을 쉽게 소비하며 빠져드는 자아도취까지 겹치면 비극은 필연이다. 역사책 곳곳에 사례가 널려 있다. 소수자나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학살, 역사적 갈등을 빚었던 주변 국가를 향한 침략 전쟁이 벌어질 때면, 종종 나타났던 현상이다. 정의를 쉽게 소비하는 세상이 고요하다면, 이는 평화가 아니다. 약자의 침묵일 뿐이다. 서로 제각각인 이들이 모인 세상에서 평화를 일구려면, 어려운 공부가 필요하다. 

ⓒUnsplash



지금은 쉬운 정의의 실천이 필요할 

어려운 정의는 어렵게 배워야 한다. 정의란 어려운 것이므로, 나와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정의로 착각할 때가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우리와 다른 이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악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와 우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착하거나 정의롭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더 악해지지 않게끔 스스로 경계하게 된다. 아울러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편견을 삼가고 존중하게 된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따지는 까다로운 공부가 지닌 쓸모는 이런 것이다. 어려운 정의를 어렵게 배우느라 쓴 시간과 노력은 나와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이다.   

이어지는 질문 역시 어렵다. 앎과 실천을 흔히 묶어 이야기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알기 힘들다. 인간은 무엇이 정의로운지 알기만 하면, 자연스레 실천에 나서는 존재인가. 대개는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나 경험으로 안다. 질문을 좁혀보자.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지식의 양과 실천에 나설 확률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정의나 윤리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올바른 실천을 할 가능성이 높아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장의 쓸모와 무관한 지식과 지식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쓸모도 없는데, 정의로운 실천에 나설 확률까지 낮은 지식인이라면, 굳이 존중할 필요가 있을까. 

‘배움과 실천’, 정의가 무엇인지를 배워서 행하는 일, 생각해보면 참 까다롭다. 하지만 그 까다로움을 인정해야 공동체가 평화롭다. 어려운 정의를 쉽다고 속이는 세상에선 폭력의 족쇄가 풀린다. 

물론, 이는 평화가 유지되는 동안에만 통하는 이야기다. 어려운 정의를 어렵게 공부하며 유지한 평화가 깨진 뒤의 정의는 결코 어렵지 않다. 폭력으로 생명을 짓밟는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히 맞서야 한다. 갓 걸음마를 뗀 아이도 몸으로 알고 있는, 아무런 공부 없이도 깨닫는, 아주 쉽지만 정의로운 길이다.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대장 부리바)〉의 배경이었고, 지난 세기 끔찍한 기근과 원전 사고가 있었던 땅, 우크라이나에서 정의가 불타고 있다. 어려운 정의를 어렵게 공부하는 대신, 쉬운 정의를 실천할 때가 됐다. 우크라이나에겐 평화를, 침략자에겐 저주를! 


글/ 성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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