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습득론을 공부하다 보면 스티븐 크라센(Stephen Krashen)이라는 학자를 자주 접하게 된다. 크라센은 입력 가설이라는 습득의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외국어를 교육할 때 학습자의 중간언어 i보다 ‘+1’만큼의 지식을 입력해야만 교육의 효용성이 높다는 내용이다.
크라센이 주장한 이 ‘i+1’의 원칙은 어찌 보면 참 설득력이 있는 가설인 것 같다. 덧셈과 뺄셈 등 사칙연산을 갓 배운 사람에게 미분과 적분을 가르친다면 그 교육이 잘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i+1’이 도대체 얼마만큼을 말하는 것인지를 구체화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다. 의욕이 앞서는 교사는 ‘+1’의 내용을 크게 잡을 것이고, 배려심이 앞서는 교사는 ‘+1’의 내용을 작게 잡을지도 모른다. 학습자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교사는 ‘i’를 상대적으로 높이 진단할 것이며, 학습자를 우려하고 염려하는 교사는 학습자의 실제 실력보다 ‘i’를 낮추어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i+1’이라는 입력 가설은 사뭇 명확한 원칙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꽤 불확실한 기준이 된다.
최근 외국어 학습 및 습득에서도 ‘상호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관점이 부각됨에 따라 교실 안에서 교사가 학습자를 가르치고, 지도하면서 사용하는 말인 ‘교사말’이 하나의 주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혹시 한국어 교실에서 교사가 학습자들에게 한국어를 사용하여 수업하고 있는 장면을 잠깐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어 교사의 ‘교사말’이 일상어와 어떻게 다른지를 금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교실 안에서 한국어 교사는 목표어인 한국어를 학습자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더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말을 쉽고 간단하게 변형하여 발화한다.
“컴퓨터를 보세요. 선생님은 A입니다. 여러분은 B입니다. 선생님이 말해요. 그리고 여러분이 말해요.” 어찌 보면 마치 유치원 선생님이 언어 습득이 완성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말과 달리 한국어 교사의 ‘교사말’은 학습자의 숙달도와 학습 경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교사는 학습자가 1급인지, 3급인지를 판단하고, 3급 학습자라면 이전의 숙달도에서 어떤 어휘, 문법을 학습했는지를 염두에 둔 채 교사말에 사용할 어휘 및 문법을 고른다.
초보 교사는 간혹 학습자가 아직 배우지 않은 문법을 사용하여 교사말의 성공적인 사용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으며, 너무나 노련한 베테랑 교사는 반대로 일상어를 구사해야 할 순간에조차 학습자에게 말하던 습관이 남아 단순한 문장으로밖에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통제되고 정비된 교사의 말, 그 말은 교사가 되기 이전부터 한국어 교육 실습 등을 통해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연마되고 준비되어온 엄격한 훈련의 말이기도 하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둥지 안의 아기 새들을 빨리 독립시키고자 둥지 밖으로 재차 밀어내는 어미 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포근한 어미의 둥지에 계속 남으려는 아기 새들과 어떻게든 둥지 밖 실제 세계로 아기 새를 밀어내어 강하게 키우고자 하는 어미 새의 줄다리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외국어 습득에 대해서는 무수한 가설들이 있지만, 그 가설들은 정설이 아닌 가설이기에 습득의 신비를 풀어가는 다양한 디딤돌일 뿐 정답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외국어가 어떠한 순서로, 어떠한 원리에 의하여, 어떠한 변인에 영향을 받아 습득되는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의 영역에 해당한다. 학습자들은 저마다의 무수한 개성과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하여 습득의 원리를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아기 새들을 둥지 밖으로 애써 밀어내면서도 빨리 말하지 않는 어미 새의 자잘한 정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학습자들을 실제 언어 현장에 자꾸만 던져내면서도, 교실 안에서만큼은 아주 천천히, 아주 엄격하게, 통제되고 준비된 교사말에 의하여, 발화하고 상호작용하는 한국어 교사의 느린 그 말이 나에게는 마치 어미 새의 잔정인 것만 같다. 그 잔정을 발견하고 학습자를 온 힘으로 배려하는 것, 개별 학습자에게 적합한 ‘i+1’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 그것이 외국어 습득의 신비를 밝히는 거대한 일보다도 더욱 숭고한 ‘자잘한 노력’이지 않을까.
글과 사진. 김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