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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y 18. 2022

절제력이 완성한 격정의 로맨스

<브리저튼> 시즌 2

역사 로맨스물을 칭하는 다른 이름으로 보디스 리퍼(bodice-ripper)가 있다. 보디스는 드레스의 상의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고, 리퍼는 말 그대로 찢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르를 비하하는 의미도 담긴 이 명칭은 역사 로맨스물이 가진 역설적 선정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족 외의 다른 남성과 어두운 곳에 같이 서 있기만 해도 스캔들이 되는 보수적인 시대, 몇 겹의 치마 속에 감춘 섹슈얼한 열정을 묘사하는 금기의 흥분이 이 장르의 대중적 인기를 만들었다. 

2020년 크리스마스에 공개한 넷플릭스의 <브리저튼> 시즌 1은 이 표현에 딱 걸맞은 작품이다. 이 드라마 시리즈는 19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브리저튼가 여덟 자녀의 로맨스를 그린 동명의 역사 로맨스 소설 시리즈를 각색했다. 제작자가 파격적 멜로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와 <스캔들>의 숀다 라임스이기에, BBC의 역사 드라마보다는 미국 드라마 같은 방식일 거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뚜껑을 연 <브리저튼> 시즌 1은 그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넷플릭스 사상 가장 많은 의상 제작비를 들였다는 화려한 의상과 세트, 백인 중심의 역사물을 뒤집은 다인종 캐스팅, 빌리 아일리시나 아리아나 그란데의 곡 같은 팝을 클래식으로 편곡한 배경음악 등 새로운 시도가 돋보였다. 거기에 고전물 치고는 수위 높은 장면들까지, 폭발적인 화제를 낳은 시리즈의 시작이었고, 개봉 첫 주부터 놀라운 기록을 세우면서 시리즈의 팬을 만들었다. 

©넷플릭스

다만 시작이 화려하면 후속작에 부담이 따른다. 시즌 1이 인기를 끈 핵심이 브리저튼가의 장녀 다프네(피비 디네버)와 헤이스팅스 공작(레지 장 페이지) 사이의 불꽃 튀는 케미스트리이기에, 작품의 초점이 브리저튼가의 장남 앤소니(조너선 베일리)로 옮겨 가서는 전작만큼 흥미를 끌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시즌 1에서 난봉꾼으로 등장한 앤소니이기에 새로 나오는 여주인공 케이트(시몬 애슐리)와 로맨스에 빠지는 내용이 잘 어울릴까 하는 회의적인 전망도 초반에는 있었던 듯싶다. 

하지만 2022년 3월 25일 공개한 시즌 2는 전작과 사뭇 다른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시즌 2의 원작 <나를 사랑한 자작>(국내 번역 제목은 <나를 사랑한 바람둥이>)의 도입부에서 브리저튼가의 장남 앤소니는 난봉꾼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하기로 작정한다. 그는 그 시즌의 다이아몬드 에드위나(차리트라 찬드란)에게 청혼하기로 하지만, 에드위나의 엄격한 언니 케이트가 그 결혼을 반대하려 하자 서로 티격태격하다 사랑에 빠진다. 드라마는 원작 소설에서 기본 구조를 가져왔지만 현대적 가치관을 반영해 많은 부분을 각색했다. 

<브리저튼> 시즌 2도 시즌 1과 비슷한 방식의 변용이 있다. 케이트와 에드위나는 원작에서 셰필드라는 영국 가문의 딸이지만 드라마에서는 인도계인 샤르마 가문의 딸들로 바뀌었다. 그리고 케이트는 자연을 사랑하고, 사냥과 말타기에 능한 인물로 그려지면서 캐릭터에 자주성이 부여되었다. 한편 앤소니는 소설에서 이른 죽음을 맞은 아버지처럼 자신도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사로잡혀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졌지만, 드라마에서는 더 상식적으로 가장으로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케이트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남자가 되었다. 케이트 또한 단순히 앤소니가 난봉꾼이라는 소문 때문에 그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소녀 가장으로서 갖는 의무감과 새어머니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에드위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한 인물이 되었다. 에드위나도 단순히 순진한 동생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여성으로 그렸다. 

©넷플릭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건 <브리저튼 2>가 보디스 리퍼라는 장르의 오명을 영리하게 이용한 점이다. 드라마와 책이 본격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은 케이트가 벌에 쏘이는 장면부터다. 케이트와 앤소니가 정원에서 말다툼을 벌이며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서 케이트가 벌에 쏘이고, 아버지를 벌 아나필락시스로 잃은 앤소니의 트라우마가 극한으로 치닫는다. 책에서는 이성을 잃은 앤소니가 케이트도 죽을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드레스를 찢고 독을 빨아내려던 순간에 어머니 레이디 브리저튼과 레이디 메리, 그리고 수다스러운 페더링턴 부인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스캔들을 막기 위해 갑작스레 결혼하게 된다. 즉 선 결혼, 후 연애라는 로맨스의 클리셰다. 드라마에서는 트라우마 때문에 공황에 빠진 앤소니를 케이트가 진정시키는 전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면서 감정적 안정을 주고받고 서로의 아픔을 이해한다. 드라마에서는 에드위나에게 청혼하면서도 케이트에게 끌리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고뇌에 빠지는 앤소니의 심리가 중심이 된다. 

여기에서 로맨스물로서 <브리저튼> 시즌 2가 가진 매력이 만들어진다. 앤소니와 케이트는 아주 가까이 다가가도 마지막 순간에는 젠틀맨과 레이디로서 본분을 잃지 않으려 서로 밀어낸다. 보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자극적인 장면이다. 두 사람이 서로 닿으려는 순간 섹슈얼한 긴장은 극으로 치닫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돌아서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연애 향방은 점점 미궁에 빠진 가운데 서로를 향한 갈망은 점점 증폭된다. 

어떤 평론가들은 시즌 1에 비해 덜 선정적인 면이 시즌 2의 약점이라고 했으나, 진정한 로맨스물 팬들은 안다. 소위 ‘혐관’에서 시작한 사랑이 더 흥미로우며,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없어도 가까이에서 돌아서는 절제가 더욱더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거기에 앤소니 역의 조너선 베일리가 케이트를 향한 열정을 실감 나게 표현하는 연기력을 보여주며 한층 더 많은 팬을 열광하게 했다. 금기와 자제는 갈망을 만드는 질료라는 역설의 로맨스다.

<브리저튼> 시리즈는 현재 시즌 4까지 확정된 상태다. 콜린과 페넬로페(a.k.a 레이디 휘슬다운)의 로맨스가 준비되었고, 원작에는 없는 엘로이즈와 인쇄공 테오 샤프의 관계도 호기심을 자아낸다. 남매들의 로맨스를 그리면서 드라마 시리즈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또 어떤 시도를 보여줄지, <브리저튼>의 팬들은 새로운 에피소드를 향해 타오르고 있다.  


글.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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