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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y 27. 2022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와 사람을 만나며 생각한 것들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전주에서 이 글을 쓴다. 올해로 23회째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에 출장을 와 있다. 영화 일을 시작하면서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매년 5월은 전주에서 맞곤 한다. 영화를 보고, 감독, 배우, 스태프, 관객과 함께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지난 2년간은 코로나19로 창작자들과 관객이 충분히 영화제를 즐기지 못했는데 올해는 다행히도 사정이 나아져 극장도 거리도 북적인다. 극장 상영을 마친 이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대체로 이렇게 모이는 것 같다. “이렇게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는 일이 정말 오랜만이다. 감동적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 영화제를 통해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될 때, 만든 이들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질 때가 있다. 관객과의 대화의 자리에서 감독과 배우는 쥐고 있던 마이크에 들뜬 기쁨과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기도 한다. ‘어버버’하며 대답이 꼬이기도 부지기수다. 그 떨림은 오직 그 순간에만 가능한 일, 이때가 아니면 다시 없을지도 모를 기분이라는 생각이 드니 옆에 있던 나까지 괜스레 애틋해진다. 한편, 공개된 지는 한참 지난 영화지만 색다른 기획으로 다시금 상영의 기회를 얻게 된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영화의 창작자는 몇십 년 전 영화를 지금의 관객과 새로이 만나며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내 일은 이처럼 누군가의 첫 순간을 함께하거나 새로이 무대에 서는 누군가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만든이의 감정의 파고와 파동이 나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전해질 때면 그날의 관객과의 대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의 주인공은 이창동 감독이다. 〈초록물고기〉(1997), 〈박하사탕〉(1999), 〈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10), 〈버닝〉(2018)까지 여섯 편의 장편을 만들었고 단편 〈심장소리〉(2022)를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한다. 프랑스의 알랭 마자르가 이창동의 영화 세계를 조명하며 만든 다큐멘터리 〈이창동: 아이러니의 예술〉(2022) 역시 최초로 공개된다. 이번 특별전을 기념하는 책자 작업에 참여하며 나는 오랜만에 〈시〉를 다시 보고 〈시〉의 세계에서 ‘본다’는 것의 무력함과 무자비함, 그럼에도 계속해서 볼 수밖에 없는 보기의 난처함에 관해 썼다. 감독과의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내게도 이번 특별전은 ‘첫’ 순간이다. 

영화 잡지사에 입사해 환영식을 하는 자리에서 한 선배가 물었다. “좋아하는 한국 감독이 누굽니까?” 그때 ‘어버버’하며 대답했던 이름이 이창동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내게 시대의 지표처럼 남아 있다. 1997년이라고 하면 나는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IMF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그걸 영화로 치환하면 〈초록물고기〉가 된다. 어떤 필자가 명명했듯 ‘영화 고전주의자’인 이창동의 영화는 개인과 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문제에 천착했던 그 시절 나에겐 질문이자 대답이 돼줬다. 물론 지금의 나는 또한 그때의 나와 다르기에 그때의 내가 본 영화와 지금 다시 본 영화가 늘 같은 정도의 강도로 오지는 않는다는 걸 인정한다. 그럼에도 시간이 한참 흘러 지금 다시 본 이창동의 영화는 질문의 내용은 달라졌을지언정 여전히 질문이자 대답이 돼준다. 이창동 감독과는 잡지사에서 일할 때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지금 그의 영화로 그와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도리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이라는 저 말이 이창동의 영화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음을 이제는 조금 알겠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볼 수밖에 없는 것, 차마 볼 수 없는 것. 그 어디쯤 영화가 있다. 


작가냐감독이냐


‘영화보다 낯선+’이라는 섹션으로 김영글, 송주원 작가를 만났다. ‘영화는 이러하다’, ‘이런 게 영화다’라는 어쩌면 고정관념, 또 어쩌면 관습인 정의를 무색하게 하는 영화들을 소개하는 섹션이다. 〈파란 나라〉(2020), 〈해마 찾기〉(2016)를 만든 김영글은 텍스트, 더 구체적으로는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영상과 출판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가 주목하는 이야기라면 대체로 사회적, 역사적으로 소외되고 주변화되고 비가시화된 존재들이다. 흔히 영상과 책은 전혀 다른 물성의 매체라고 하는데 그에게는 오히려 아주 가까이 붙어 있고 무척이나 닮아 있는 매체다. 푸티지 영상, 실사, 애니메이션 등을 구성, 배치, 편집해 새로운 역사 읽기를 시도하는 그는 자신을 ‘편집자’라는 정체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송주원은 댄스 필름 혹은 퍼포먼스 아트로 명명되는 일련의 작업을 한다. 신체 언어인 춤, 움직이는 몸을 통해 공간을 다시 드러내 보인다. 특히 그가 주목하는 공간은 한국의 개발과 재개발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다. 〈마후라〉(2021), 〈나는 사자다〉(2019), 〈풍정.각(風精.刻) 푸른고개가 있는 동네〉(2018)를 통해 공간이라는 몸, 무용수의 몸을 통한 공간의 재인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 부분이 있다. 글, 영상, 무용, 미술 등 다양한 매체와 매개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이들이 아닌가. 영화관에서는 영화감독으로, 미술관에서는 전시 작가로 불린다. 호명하는 말이 많다는 것의 곤란함과 애매함에 관해서라면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나도 이름이 많으니까. 영화평론가, 작가, 프로그래머, 영화 저널리스트…. 이에 관한 두 작가의 입장은 이러했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 그리고 작업’, ‘나는 누구다’, ‘나는 무엇이다’라고 명명하고 정의 내리기보다는 ‘내가 하는 작업으로 설명되길 바란다.’는 게 그들의 대답의 요지다. 감독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하다. 혹은 그 모든 것도 아니다. 경계, 사이 어딘가를 떠돌고 부유하며 뭔가를 만들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에게서 나를 본다. 나도 그렇다.


영화는 영화인가


세르히 로즈니챠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에 참여해 화상으로 감독님과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벨라루스에서 태어나 우크라이나에서 자란 그는 소비에트 지배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 민족의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왔고 유럽 학살의 역사를 조명하기도 했다. 〈미스터 란즈베르기스〉(2021)는 리투아니아 독립운동을 이끈 정치인이자 음악가 란즈베르기스를 인터뷰하며 1990년대 정치 격동기를 아카이빙 자료로 구성한 작품이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30여 년 전에 벌어진 독립 투쟁기라지만 ‘정치’라는 게 갖는 핵심적인 역할, 의제, 정치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과 역학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시의적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비 야르 협곡〉(2021)은 1941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점령한 나치 독일이 인근 바비 야르 협곡에서 약 3만 4,000명의 유대인을 총살한 ‘바비 야르 대학살’을 역사적 아카이브 자료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과거를 어떻게 지금 시점에서 재구성하고 말하고 기억할 것인가. 다큐멘터리 영화의 오랜 질문이다. 로즈니챠의 영화를 보면서 아카이브 푸티지에 사운드와 편집의 세공이 덧입혀지며 맥락이 만들어지는 법을 본다. 마치 거대한 건축물의 설계도처럼 그가 하나씩 축조해나가는 세계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최근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적극적인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 러시아의 영화인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영화아카데미로부터 회원 자격을 박탈당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관해 유럽영화아카데미의 미온적 태도를 맹비난하며 멤버십에서 탈퇴했다. 때론 ‘영화는 영화니까’ 하며 스크린 너머의 세계를 안도하며 본다. 그게 영화다. 그런데 또 어떤 순간에는 영화와 삶, 영화와 정치, 영화와 역사가 아주 가까이 붙어 있다고 느낀다. 로즈니챠의 영화가, 로즈니챠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PS

남은 영화제 기간에 또 어떤 영화와 사람을 만날까. 그게 어떤 영화든, 그게 누구든, 뭔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일 수 있길 바란다. 그 우연한 만남을 기다린다. 


글. 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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