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매일 머리를 깎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장애인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장애인의 이동권과 노동권, 자립 생활, 권리 보장을 위한 예산을 마련하라는 것. 이들은 지난 3월 30일부터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답변을 촉구한 것에 이어, 기획재정부의 장애인권리예산 관련 답변을 촉구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이어, 5월 6일부터 4호선 삼각지역에서 삭발 투쟁을 결의한 장애 활동가들의 결의문을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
요지/ 홈리스 야학 학생회장
요즘 무릎 관절이 많이 불편해서 지하철의 가파르고 긴 계단을 보면 두렵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주 이용하는 남영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습니다. 예전에 무릎이 아픈 상태에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다 다리의 힘이 풀려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은 적이 있습니다. 아픈 건 둘째치고 너무 창피하더군요. 홈리스들도 짐이 많아서, 몸이 불편해서, 나이가 많아서 등 많은 이유로 지하철 타기가 쉽지 않습니다. 출구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게 아니어서 건널목을 건너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지하철 한번 이용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하철은 누군가에겐 빠른 이동 수단이지만, 저같이 아픈 사람들은 이용하기 위한 과정이 무척 힘듭니다. 누구나 차별 없이 공공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박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머리를 깎는 행위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 머리 모양조차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했던 중증장애인들이 지금까지 기른 머리를 깎는 것은 신체 일부를 자르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고 화도 납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 의해 제 삶이 토막 나는 걸 더 이상 원치 않습니다. 제 삶을 저 스스로 온전히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마음껏 이동하고, 마음껏 공부하고, 마음껏 일하며 그렇게 제 아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오늘 이렇게 짧게 자른 머리를 보고 아들이 놀라진 않을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들에게 제 짧은 머리를 보이며 당당히 말하려고 합니다. “아빠는 지금부터 아빠의 자립 생활을 위해, 모든 장애인 삼촌과 이모들의 자립 생활을 위해 다시 싸울 거다.”라고 말입니다.
정기열/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
제가 사는 경기도는 장애인 인구가 전국에서 제일 많지만, 저상버스가 2020년 기준 15%만 운행되고 있습니다. 특별교통수단인 장애인 콜택시도 경기도 31개 시군마다 운행 규정이 달라서 바로 옆 인근 지역에도 가지 못합니다. 꼭 가려면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합니다. 그나마 ‘목적 제한’이라는 규정 때문에 병원 진료 목적 이외에는 가지 못합니다. 급한 용무가 있거나 지인을 만날 때도 그 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특별교통수단이 있는지 먼저 확인하고 약속을 잡아야 합니다. 친구와 놀고 싶으면 부모님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했던 미성년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데도 우리의 이동권 요구가 장애인 특혜를 바라는 겁니까? 이런 현실이 슬프기도 하지만 저의 슬픔으로 단 한 명의 시민이라도 장애인 이동권에 관심 가져주신다면 저의 결의에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이창준/ 전남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저는 전남 목포에 살고 있는 중증장애인입니다. 전남 지역은 지하철도 없고, 저상버스도 많지 않아서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 장애인 콜택시입니다. 그런데 이조차 많지 않아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365일 24시간 다니지도 않습니다. 이동권은 모든 국민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지난해 전남 화순에서 18세 장애인이 시설에서 의문사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장애인은 평생 시설에서 살면서 이유도 밝혀지지 않은 채 죽어야 합니까? 장애인도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평범하게 살 권리를 제도화하는 탈시설지원법이 국회에서 계류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시민 여러분과 함께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지지와 연대를 부탁드립니다.
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오늘 저는 꾸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머리를 밉니다. 그만큼 절박하기에, 장애인 권리 예산을 보장하라는 것이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더없이 절박하기에 삭발을 합니다. 장애인은 이동할 수 없었고, 이동할 수 없기에 교육받지 못했고, 교육받지 못했기에 노동할 수 없었고, 노동할 수 없기에 시설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런 삶이 싫습니다. 아니, 다시는 이런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권리로 보장된, 법에 명시된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종광/ 경북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
같이 살고 싶습니다.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고, 배우고, 움직이고, 투표하고, 사람도 만나면서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갖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정도면 장애인 권리도 많이 좋아지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어떻게 100% 다 갖출 수 있느냐, 이쯤에서 그만하라며 침묵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멈출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누려야 할 행복한 삶을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박탈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리. 양수복/ 자료제공.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진. 황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