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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y 27. 2022

동탁을 죽인다 한들

“역사에서 약자가 살기 좋았던 시대는 없다. 흔히 태평성대라고 불리는 시기 역시 누군가에겐 지옥이었다. 하지만 힘없는 이들이 그나마 살 만했던 시기, 유난히 힘든 시기의 구분은 있다. 조금이나마 덜 힘든 세상을 만들려면, 눈앞의 악을 방치하면 안 된다. 전횡을 하는 동탁을 앞에 놓고, 동탁을 죽여봤자 세상은 별로 안 바뀐다는 생각만 했다면, 〈삼국지연의〉는 더욱 끔찍한 내용으로 채워졌을 게다.”


한국 남자들이 종종 그렇듯, 나도 어릴 때는 소설 〈삼국지연의〉에 흠뻑 빠져 지냈었다. 부모가 된 지금 돌아보면, 〈삼국지연의〉는 아이들에게 딱히 권할 만한 책이 아니다. 김훈 작가가 이야기했었다. “나와 내 또래 남자들은 〈삼국지〉를 너무 많이 읽어서 이 모양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라고.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은 대부분이 군사 깡패”라고도 했고, “〈삼국지〉가 동양 남자들의 정신에 미친 해악은 작지 않다.”라고도 했다. 

조조와 유비

나도 동의한다. 〈삼국지연의〉는 해롭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녹아 있다. 강자 숭배를 부추기고, 여성과 약자를 도구로 여기는 태도를 강화하는 내용이다. 권력에 대한 동경을 내면화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삼국지연의〉 애독자였으리라는 게 내 믿음이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워낙 여러 번 읽은 탓에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삼국지연의〉를 처음 읽었을 때, 당황했던 대목 중 하나가 동탁의 죽음 이후였다. 도입부를 읽을 때는, “역적 동탁”이 가장 나쁜 사람 같았다. 그래서 동탁만 죽으면, 곧 태평성대가 열릴 줄 알았다. 당연히 〈삼국지연의〉의 결말 역시 동탁의 죽음이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진짜 난세, 정말 끔찍한 속임수와 학살은 동탁이 죽고 난 뒤에야 벌어졌다. 또 동탁을 죽인 이들은, 알고 보니 〈삼국지연의〉 전체 이야기에서 조연에 불과했다. 주인공 대부분이 증오하는 동탁이 죽었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 열리지는 않았다. 

뉴스를 볼 때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쩌면 동탁이 죽고 난 뒤의 중국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지식인 다수가 반대하거나 증오하는 거대한 악, 현대사의 동탁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 태평성대인가? 그렇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다. 폭력의 서열에서 가장 위에 있는 자를 흔히 일진이라고 하는데, 폭력적인 문화가 여전하다면, 일진 한 명이 사라진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것은 없다. 일진 바로 아래 있는 자들, 일진의 눈치를 보느라 폭력을 자제했으나, 내심 일진을 동경하고, 일진에게 열등감을 느끼던 그들이 예전의 일진 노릇을 하곤 한다. 사라진 일진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은 더욱 심한 폭력과 갑질로 내몰기도 한다. 을 위치에서 설움을 겪던 이가 갑자기 갑이 되면, 더 심한 갑질을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약자 입장에선 일진이 사라진 뒤에 폭력의 총량이 더 늘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일진 한 명이 사라진 대신, 그 흉내를 내며 경쟁하는 이들은 여럿이 됐으니. 


일진보다 더한 무엇


〈삼국지연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천하대세(天下大勢), 분구필합(分久必合), 합구필분(合久必分)”.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천하의 대세는 나눠져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져 오래되면 반드시 나눠진다.”는 뜻이다. 일진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순환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다. 

권력이 집중된 거대 악, 한 명의 일진이 사라지면, 그보다 아래에 있던 작은 일진 여럿이 서로 각축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약자들이 겪는 폭력의 총량은 꾸준히 늘어난다. 많은 이들이 차라리 일진 한 명이 폭력을 독점하는 쪽이 차라리 낫다고 여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쪼개져 있던 권력은 하나로 합쳐진다. ‘분구필합(分久必合). 나뉜 지 오래되면 합쳐진다.’ 한 덩어리가 된 거대 권력은 당연히 부패한다. 덩어리가 크니까 썩은 내도 심하다. 약자에게 예민하게 공감하는 힘도 둔해지니, 폭력과 갑질도 갈수록 잔인해진다. 결국 한 명의 일진에 반대하는 세력이 늘어나고, 그들이 서로 힘을 합쳐 맞서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역적 동탁”과 같은 일진이 사라지고, 권력은 쪼개진다. ‘합구필분(合久必分). 합쳐져 오래되면 반드시 나눠진다.’

개인의 삶도 비슷하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거대한 문제, 이것만 해결되면 살 만할 텐데 싶은 그 문제가 풀린다고 해서, 내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는 드물다. 눈앞의 문제에 골몰하느라 신경 쓰지 못한 사이 계속 곪아왔던 오래된 문제, 나를 괴롭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새로 잉태된 작은 문제가 한꺼번에 나타나곤 한다. 

그러니 거대한 사회악에 맞서봐야 부질없고, 눈앞의 현안에 힘 쏟아봐야 소용없는 걸까. 그렇게 여기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소설 〈삼국지연의〉가 아닌 실제 역사를 살피면, 생각이 달라진다. 역사에서 약자가 살기 좋았던 시대는 없다. 흔히 태평성대라고 불리는 시기 역시 누군가에겐 지옥이었다. 하지만 힘없는 이들이 그나마 살 만했던 시기, 유난히 힘든 시기의 구분은 있다. 조금이나마 덜 힘든 세상을 만들려면, 눈앞의 악을 방치하면 안 된다. 전횡을 하는 동탁을 앞에 놓고, 동탁을 죽여봤자 세상은 별로 안 바뀐다는 생각만 했다면, 〈삼국지연의〉는 더욱 끔찍한 내용으로 채워졌을 게다. 

“역적 동탁”, 혹은 다른 어떤 거대 악은 제거해야 옳다. 그 뒤에 힘없는 이들이 그나마 어깨 펴고 사는 세상이 오려면, 악과 싸우는 열정 말고도 다른 역량이 필요하다. 악과 싸우는 이는 정의롭다. 하지만 정의로움이 악을 증오하는 정도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정의를 사랑해서 불의를 증오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면의 증오 그 자체를 쏟아낼 표적으로 불의를 고르는 이들도 있다. 후자가 꼭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그는 정의가 아닌 증오 배설을 원한다. 청소라면 모를까, 배설을 통해서는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

“역적 동탁”을 제거하려 모의하는 이들이, 동탁이 아닌 새로운 권력이 만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대화도 나눴더라면, 〈삼국지연의〉는 덜 나쁜 책이 됐을 수도 있겠다. 


글. 성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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