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단순했다. 날도 좋고 바람도 향긋하니, 봄에만 한정적으로 공개하는 고택을 이참에 둘러보자는 마음. 종로구 사직공원 근처를 지나면서 한 번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곳이다. 사직단 바로 옆 비탈길 위. 거기에 시공간을 흔드는 비밀의 문이 있었다.
양옆의 행랑보다 지붕을 높게 올린 솟을대문. 그 문을 통과하자 새로운 차원의 공간이 펼쳐졌다. 일상의 소리가 꺼지고, 바람의 결도 달라졌다. 이윽고 들려오는 청아한 풍경 소리. 자연의 불규칙한 리듬과 강도, 바람이 만든 정렬되지 않은 풍경 소리에 분주하던 마음이 금세 평온해졌다.
인왕산 자락, 단정하면서도 품위가 느껴지는 이곳은 운경고택. 12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운경 이재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사저이자, 현재는 그의 후손들이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다양한 실험을 해가는 공간이다. 전통 서울식 한옥으로 300여 평 남짓한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와 연못까지 아늑하게 담겼다. 대중들에게 공개된 것이 2019년이니,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이제 막 3년이 지난 고택이다. 현존하는 몇몇 고택을 다녀봤지만 운경고택은 조금 달랐다. 손이 많이 가는 기름 먹인 한지 장판, 반들반들한 대청마루와 나무 난간, 꽃잎이 떠 있는 연못에서 유유히 노니는 잉어들. 곳곳에 정성 어린 손길이 계속 이어져 여전히 집으로서 기능하는 듯한 생명력이 느껴졌달까. 참 근사했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운경 이재형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지만 땅에 숨어 있던 맥락까지 더하면 자그마치 400여 년의 역사가 한 줄로 연결된다. 이곳은 조선의 14대 왕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과 그의 사손이 살던 도정궁 터의 일부다. 창경궁과 비슷한 규모의 거대한 궁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왕실의 권위를 훼손할 목적으로 도정궁 필지를 200여 개로 나누어 팔아버렸다. 한국전쟁 이후 운경 이재형이 도정궁 터가 매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
1953년 매입한 것. 실제 그는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의 10대손이다. 자신의 근원을 찾아 회귀하듯 조상의 숨결이 남아 있는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다.
“예약하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코끝에 맴도는 묽고 연한 향기가 꽃내음인가 싶을 무렵, 관계자가 다가왔다. 길지 않은 리스트에서 내 이름을 확인한 그는 근대 딱지본 소설 같은 책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소설 형식의 이번 전시 해설서예요. 세 가지 타입의 표지인데 내용은 동일하고요. 취향에 맞는 표지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오늘 방문의 목적은 ‘운경고택의 봄봄봄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 전시 관람이었다. 한국 현대미술의 대명사로 불리는 작가, 플라스틱을 비롯해 일상의 물건들을 쌓거나 재배치해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이. 나에게는 제주도 생태정원 카페 베케의 ‘치밀하지만 엉성하게’의 콘셉트를 만든 공간 기획자로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전시 포스터로 쓰인 이미지의 표지를 선택해 후루룩 넘겼다. 중편소설과 맞먹는 분량. 전시해설서라고 하기에는 빽빽한 텍스트에 세로쓰기를 적용해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았다. 이번 전시의 공간적 배경은 운경고택이지만 그 안의 동선을 만드는 사물들은 최정화의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 소설 형식의 해설서가 그 동선에 추동의 힘을 만들어줄 터였다. 전시에 맞춰 발간된 <춘야>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1983년생 모 대학 경제학과 교수 복지오(<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에서 따온 이름이다)가 어느 봄밤 운경고택을 찾은 후에 겪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로메리고 주식회사’로 2019년 수림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최영이 집필했다.
이 글은 소설이다. 방금 이 말을 듣고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이라고 티를 내고 쓰는 소설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 소설도 있다. 메타 픽션(meta fiction)이라고도 하는데, 대문호 보르헤스의 소설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선 이인성의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소설 쓰는 소설’을 말한다. 본문의 텍스트뿐 아니라, 전시 사진 그리고 각주까지도 모두 소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각주들은 완전한 진실이자 대체로 사실이 된다. 뭔가 포스트모던 머시기의 스멜이 나면서, 머리가 지끈거리는가? 그렇다면, 우선 이 소설을 읽으려는 당신에게, 잠깐 동안 눈을 감도록 권하겠다.
- <춘야>, p.15 중에서
<춘야>의 도입 부분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나를 둘러싼 시공간이 살짝 휘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 건. 그때 고택 입구에 놓인 커다란 고인돌 같은 반석이 눈에 들어왔다. 옆의 소나무와 너머 긍구당(肯構堂, 조상의 유업을 잘 계승해 발전시킨다)이라고 쓰인 사랑채의 편액이 꽤 잘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그 고인돌은 자연의 기물이 아닌 최정화의 작품이었다. <세한도>(2018)는 하와이 해변에서 작가가 수집한 스티로폼 부표다. 일종의 거대한 쓰레기가 고택의 앞마당에 놓여 있는 풍경은 절묘하면서 동시에 기묘했다. 추운 겨울을 견딘 소나무와, 지구 반대편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지구 반대편의 고택에 천연덕스럽게 자리 잡은 스티로폼 부표. 그림 자체보다 의미를 중요시하는 문인화의 대표 격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작품명으로 가져온 것 또한 절묘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택 출입문 앞마당에는 <Funny Game>(1998)이라는 제목의 경찰관 마네킹 한 쌍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1990년대 도로 곳곳에서 과속 차량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만든 감시의 아이콘이다. 엷게 느껴지는 학습된 위압감. 아무렇지도 않게 만져보고 옆에서 사진을 찍는 어린이 관람객 덕분에 무의식의 테두리가 허물어졌다. 그래, 이거 가짜지. 감시의 아이콘으로 만들어졌지만 정작 이 마네킹 때문에 놀라서 더 많은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이 작품은 한국 전시 당시 서울시 경찰청에 가서 작가가 직접 각서를 쓰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고. 하지만 국내외 다양한 전시에서는 호평받으며 최정화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세한도>와 <Funny Game>을 시작으로 운경고택의 사랑채, 뒷마당, 대청, 안채, 장독대에는 총 24개의 작품이 우리를 맞는다. 아니, 사실상 작품의 수는 훨씬 더 많다. 근대 조선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작가들의 문인화가 방문, 옷장 문 등 집 안 곳곳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흥미로운 이 한 편의 소설 <춘야>까지.
여러 작품 중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1000명에게 모은 밥그릇과 물병 등으로 꾸민 <거대한 밥상, 꽃의 향연 2022>였다. 사용감이 배어 있는 갖가지 식기들을 낮은 탑처럼 쌓은 작품인데, 그 낡고 바랜 일상의 기물들이 묘하게 아름다웠다. 운경 장학생 등 비영리 공익재단인 운경재단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연이 있는 그릇들을 수집해 모은 참여형 전시다. 함께 밥을 먹는 식구. ‘운경’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다양한 경로의 연대를 가족의 의미로 확장한 것이다. <춘야>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릇을 기증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는데, 읽는 재미와 함께 왠지 뭉클해지는 감정도 들었다.
한옥이라는 공간이 지닌 속도감에 사람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느려진 것일까. 주어진 1시간 20분간의 관람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관람객 대부분이 <춘야>를 읽고 걷다가, 최정화의 작품을 보다가, 다시 <춘야>를 읽으려고 멈추다가, 고택의 마루에 앉아 그늘과 햇빛 사이를 만끽하다가, 또다시 걸었기 때문일 테다. 마당과 대청마루, 여기저기 작품으로서 놓인 의자에도 걸터앉아 세로로 쓰인 소설을 더듬더듬 읽어가는 과정. 다른 전시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방식의 속도와 리듬이었다. 400여 년 동안 이어진 땅의 이야기, 현대사의 한 축을 지탱했던 집주인의 이력, 세계 유수의 갤러리와 전시를 거쳐 여기 고택에 놓인 예술작품, 모든 것이 빛나는 예술이라고 말하는 듯한 일상의 기물까지. 여러 축의 시공간이 한꺼번에 나를 통과했다. 입체적인 경험의 순간이었다. 납작하던 시간의 축에 기둥이 세워지고 바닥이 깔리더니 이내 그 사이로 향긋한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잠깐 동안 공중에 붕 뜬 듯한 비현실감을 느끼던 찰나 마루에 걸터앉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최정화 작가를 발견했다. 옆의 이는 다름 아닌 <춘야>의 작가 최영 소설가였다. 흔쾌히 옆자리를 내어주는 이 둘과 이야기를 나눴다.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일련의 과정들을 하나로 응축한 이번 전시는
1년이 넘는 준비 기간 끝에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고택을 놀이터 삼은 성실한 예술가들. 올해는 최정화 작가가 활동한 지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미술과 문학의 새로운 결합. 이 두 예술가는 운경고택에서 전에 없던 다른 형태의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운경고택의 전시 <당신은 나의 집>은 하루 5회, 회당 16명으로 6월 17일까지 열린다. 관람료가 비싸다는 리뷰가 많던데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체감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서부해당화의 꽃잎이 한 차례 꽃비가 되어 내리고, 몇 번의 해가 뜨고 다시 지는 사이 고택의 봄이 또 한번 간다. 시공간이 출렁이던 봄날의 오후. 일상으로 불쑥 들어온 춘몽의 시간을 뒤로하고 저벅저벅 다시 도심으로 걸어 나온다. 날은 좋고, 바람은 여전히 향긋했다.
글. 김선미/ 사진. 양경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