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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n 15. 2022

우미노 치카의 '3월의 라이온' 16권 포장을 뜯으며

<3월의 라이온> 16권 표지_ SANGATSU NO LION ⓒCHICA UMINO 2008 HAKUSENSHA, INC., Tokyo


때로 말과 문장은 현실보다 훨씬 거대하게 다가온다. 어릴 땐 책 속에 담긴 명언과 통찰력 있는 문구가 인생의 진리처럼 보였다. “행복한 가정의 사정은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저 유명한 첫 문장을 읽으며, 어떻게 저런 지혜와 혜안을 가질 수 있는지 경외와 신비의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시절 우리 집은, 한 줌의 경험과 나의 좁은 세계는 저 문장의 진의에 공감할 만큼 불행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저 소소한 문제와 미세하게 떨리는 고민들을 이해받고 싶어서, 진실을 관통하는 위대한 문장에 내 상황을 끼워 맞추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뭔가 깨달은 척, 아는 척하고 싶었던 동경과 질투의 흔적이었을까. 


일상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

고백하자면 내 삶을 흔든 문장의 대부분은 위대한 문학가의 문장이나 위인들의 명언이 아니라 만화책에서 마주했다. 거대한 산처럼 우뚝 솟은 명언들이 기어 올라가야 만끽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면 만화 속의 멋진 순간들은 내 곁으로 직접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는 살가운 친구였다. 현학적인 진리들이 구름 위의 별을 가리킬 때 만화는 문턱을 낮추고 옆에 걸터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나서야 절감한다. 내가 있는 자리로 다가오는 것들의 소중함을. 일상과 공감의 영역에 머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성찰이 필요한지를. 많은 시간 구름 위의 별을 동경했지만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오늘의 나를 만든 감성의 8할은 내 곁에서 삶의 소소한 순간마다 함께 수다를 떨었던 만화였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원불멸의 진리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속 깊은 친구다. 나에겐 우미노 치카 작가의 작품들이 대체로 그랬다. 

<3월의 라이온> 16권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새삼 기억을 복기했다. 단행본의 의도치 않은 매력은 오랜만에 나올 때마다 지난 이야기들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만화는 생각보다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투입되는 작업이고 일본 출판만화계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확히는 스케줄 조정이 어느 정도 허용될 만큼 유명해진 작가의 경우 작업은 꽤 느리게 진행된다. 우미노 치카 작가는 2013년 무렵부터 건강상의 이유로 단기 휴재를 반복하며 속도 조절 중이다. 거의 

2년 만에 나온 신간을 읽기 위해 <3월의 라이온>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읽다 보니 마음이 동해 내친김에 완결된 전작이자 출세작 <허니와 클로버> 열 권마저 다시 읽었다. 사실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핑계에 불과하고 신간이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작업이다. 이미 익숙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꺼내어 볼 때마다 새로운 감정에 휩싸인다. 책의 내용은 변한 게 없지만 다시 읽었을 때 뭔가 달라진다면 그만큼 내가 변한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다시 읽기는 나의 변화와 지난 궤적을 되돌아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허니와 클로버> <3월의 라이온>

우미노 치카 작가의 특징 중 하나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애정을 쏟는다는 점이다. 전체의 윤곽을 잡아주는 주인공이 있긴 하지만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꼼꼼히 따로 그리는 집단 주인공 구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각자의 사연과 각자의 입장, 각자의 에피소드를 그려나가는 방식은 자연스럽게 단편영화의 구성을 띤다. 우미노 치카 작가의 작품은 일종의 단편 에피소드 연작에 가깝다. 각 캐릭터들이 쓰는 자전적 에세이 모음집이라 해도 좋겠다. 미대생들의 사랑과 성장, 청춘을 그린 <허니와 클로버>도 집단극에 가까울 만큼 다양한 캐릭터들의 사연을 펼쳐냈지만 <3월의 라이온>에 와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프로 장기 기사라는 이색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하는 <3월의 라이온>은 각 장기 기사들이 걸어온 면면을 하나씩 소개한다. 여느 작품이라면 이야기의 중심축이 무너지고 사변적으로 확장된다고 비판받겠지만 우미노 치카의 세계에서는 전혀 단점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애초에 거대한 줄기를 따라가는 서사극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순간들을 멈춰서 가만히 지켜보는 구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3월의 라이온> 1권 표지_ SANGATSU NO LION ⓒCHICA UMINO 2008 HAKUSENSHA, INC., Tokyo

우미노 치카는 가만히 봐야 예쁜 것들을 찬찬히 공들여 바라본다. ‘바다 근처 유원지’(羽海野)에서 따온 필명처럼 그의 시간은 일상보다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오너캐(오너 캐릭터. 자신을 대표하는 오리지널 캐릭터의 줄임말)의 디자인을 곰으로 표현한 것도 어쩌면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느리게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 일상이라는 핑계로 흘리고 지나간 순간들을 조심스레 담아 다시 보여주는 작업은 마치 바닷가에서 보석을 줍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물론 우미노 치카가 줍는 보석은 반짝이는 황금이 아니라 조각난 조개껍질이다. 남들이 볼 땐 흔해 빠진 조개껍질을 소중히 품고 곱게 씻어 내 방 한구석에 놓아두었을 때, 익숙한 방 안 어딘가에서 바다소리가 들려오는 마법. 우미노 치카가 일상을, 평범함을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이 이와 같다. 당연하고 별거 아니라서 기억하지 못했던 것들, 스쳐 지나가는 것들, 내 삶의 엑스트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부피와 실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너를 이제 안다는 것. 아니 알고 싶다는 것. ‘너를 이해한다’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기 전에 오랜 시간 고민하고 상대의 상황을 상상했던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넓은 시야와 따뜻한 마음. 그리하여 누군가의 이야기는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모두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깊어진다.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감흥

전반적으로 에피소드 구성인 까닭에 우미노 치카의 작품을 다시 볼 때마다 마음을 울리는 에피소드, 마음에 와 닿는 캐릭터가 달라진다. 아마도 그만큼 내가 달라진 것이리라. 예전에는 <허니와 클로버>에서 마야마는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야마다는 마야마를 짝사랑하는 에피소드에 마음을 빼앗겨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부러진 차조기 잎을 보며 이뤄질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투영한 에피소드가 못내 안쓰러웠다. 부러진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마치 내 이야기 같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땀에 젖은 팔이며 몸에, 여름밤의 짙은 공기가 휘감겨온다. 바람 속에 희미하게 화약 냄새가 섞여 있다. 아마도, 어느 집 마당에서 아이들이 작은 여름을 태우고 있나 보다.” 차조기 잎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야마다의 실루엣 사이 내레이션 구성으로 삽입된 대사 한 줄 한 줄이 어떤 에세이보다, 어떤 단편영화보다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종종 우미노 치카의 연출은 영상적이다. 동시에 매우 문학적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여름의 냄새는 아직도 이 에피소드의 몇 칸의 표현으로 기억된다.  

이번에 다시 전체를 복기하면서 마음에 와 닿은 건 프로 장기 기사들의 이야기였다. 프로 장기 기사의 세계에 뛰어든 소년 키리야마 레이의 이야기를 담은 <3월의 라이언>은 근작으로 갈수록 키리야마 소년 이외 장기 기사들의 에피소드의 비중을 키워가고 있다. 이번에 다시 읽을 때 유난히 마음이 가는 에피소드는 신인왕 타이틀을 걸고 대결을 벌인 야마자키의 사연이었다. 키리시마는 친구이자 (자칭) 라이벌인 니카이도를 꺾은 야마자키와 대국을 벌인다. 야마자키는 몸이 약한 니카이도의 약점을 공략하기 위해 장기전으로 몰고 간다. 

결국 니카이도는 병원에 실려 가고 이에 분노한 키리시마는 정면 승부로 야마자키를 꺾어버린다. “자기의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 남에게 떠넘겨버리는 것을 정정당당하다고 한다면 나의 대답은 단 하나, 웃기지 마!” 이 장면은 키리시마의 시점에서 비겁한 ‘빌런’을 타도하는, 소년만화의 클리셰 같은 에피소드다. 그런데 바로 이어 이 에피소드는 야마자키의 시점에서 재구성된다. 야마자키는 프로가 된 지 꽤 오래됐지만 신인왕 이외 타이틀이 없다. 좀처럼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하는 야마자키는 어느새 겁이 많아지고 신인왕 타이틀이라도 필사적으로 붙들려고 한다. “프로가 되어 6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지금은,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으로 뛰어들어도 빈손으로 돌아올 때가 대부분이었다.” 야마자키는 공포에 몸이 움츠러진 자신과 달리 몇 번이고 도전하고 몸을 던지는 키리야마와 니카이도를 보며 좌절하고 동경하고 자극받는다. “이 녀석들이 있는 세계에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다고.” 내가 야마자키의 이야기에 위로받는 건 나도 그렇게 적당히 비겁해지면서 나이를 먹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되었는가

우리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빌런을 물리치는 히어로를 동경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빌런이 왜 빌런이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어쩌면 내가 누군가의 빌런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야기 속 배경일지도 모른다는 당연한 생각을 이제야 한다.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천재이자 특별한 키리야마보다 넘어지고 좌절하고 조금씩 비겁해지는 야마자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우미노 치카는 야마자키의 사연을 단순히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로 소비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간다. “믿으면 꿈은 이루어진다. 그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다만 거기에는 한 문장이 빠져 있다. 믿고 계속 노력하면 꿈은 이뤄진다. (중략) 표어나 구호는 짧은 것이 좋다. 하지만 여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 야마자키의 독백에는 우미노 치카의 작법의 진수가 담겨 있다. 

우미노 치카는 생략된 인물들의 사연, 심리, 상황, 걸어온 생을 구체화한다. 캐릭터의 기능으로 남겨두지 않고 에피소드를 부여하고 부피를 키워 피와 살이 도는 사람으로 되살려내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야마자키도 이미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줄 알고, 특별한 의지를 지녔고,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특별한 시야를 가졌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비루하고 비겁한 동시에 충분히 특별하다. 우미노 치카가 펼쳐내는 다양한 캐릭터와 각각의 사연을 보노라면 이 모순된 형용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이제야 톨스토이의 저 유명한 문장이 생생해진다. 사정은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누군가의 사연과 각자의 이유 속에서 내가 지나온 궤적을 다시 발견하는 즐거움. 행복하고 행복한 어느 여름밤의 기억.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있을 당신이, 그리고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 궁금하다. 이 맛을 알아버린 이상, 설사 앞으로 또 2년 혹은 그 이상이 걸린다 해도 설레는 마음으로 우미노 치카의 신작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3월의 라이온> 16권이 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면서. 


글. 송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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