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사과가 진짜 멋있는 거였는데 어쩌다가 사과가 그런 의미가 된 건지 모르겠어요.”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중
사과를 언어학적으로 정의한 학자 블룸-쿨카(Blum-Kulka)에 따르면 사과라는 것은 ‘자신이 사회적인 규범을 위배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관여되었음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한다. 따라서 사과를 하면 화자는 체면이 손상되지만, 그로써 청자는 손상되었던 체면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어릴 때 동생과 다투면 엄마는 서로 사과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손을 잡고 앉아 있으라는 벌을 내리셨다. 마음이 유연한 동생들은 엄마의 화난 얼굴 앞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먼저 사과를 하고 용서받기를 원했지만, 한 고집했던 나로서는 동생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고 스스로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끝끝내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엄마의 아름다운 화해 훈육을 방해하곤 했다. 반나절이나 동생의 손을 붙들고 앉아 있으면서도 결코 사과하지 않았던 그 고집 센 어린이에게 ‘사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었다는 것을 엄마는 알고 계셨을까.
우리는 많은 경우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으며 살아간다. 복잡한 출근길, 실수로 누군가의 발을 밟았을 때에도, 마감 기한을 놓쳐 뒤늦게 업무 이메일을 회신할 때에도, 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느냐며 다소 시무룩해진 남편에게도, 소소한 사과들을 하고 또 받으며 우리의 일상은 흐른다. 때로 그 사과는 ‘진짜’일 때도 있지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또는 상황을 조금 더 유연하게 풀기 위해서 급하게 만들어진 사과일 때도 있고, 윗사람의 체면 또는 조직의 체계를 지켜주기 위하여 암묵적으로 요구받은 것인 경우도 있다.
또 마치 어려운 일을 시키거나 부탁하기 위해 상대방의 문을 노크하듯이 사과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미안하지만, 미안한데’ 뒤에는 항상 무리한 부탁 또는 명령이 따른다는 점이 바로 이러한 사과의 재미있는 일면이다. ‘네, 미안하면 시키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없는 관계라면, 그 ‘미안한데’는 무리한 지시가 곧 나에게 올 것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표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의 ‘미안’은 분명 사과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 말 안에 화자의 책임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청자의 체면 회복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사과’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남발되는 사과가 있는가 하면, 절대 사과를 쉽게 할 수 없는 이도 있는데, 바로 각 국가의 대통령이 이에 해당한다. 국가 간의 예민한 정치 사안 앞에서 어느 국가의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가벼운 사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 정치, 경제적인 문제와 결부될뿐더러 사과에 따른 책임을 전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 시 대통령들은 최대한 사과를 회피하거나 명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물의를 일으킨 공인들이 자신의 SNS에 사과문을 게시하는 것이 응당 이루어져야 하는 사건 사고의 한 절차, 또는 문화인 것처럼 SNS 사과문 게시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또 그때마다 사과문의 적절성에 대한 관심들이 쏟아지고 있다. 오랫동안 모르쇠로 있다가 뒤늦게 올라온 사과문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 끝에 용기를 냈습니다.’가 ‘다들 까먹을 줄 알았더니 안 까먹어서 올린다.’라는 의미라는 조롱이 달리기도 하고, 지나치게 상투적이거나 짧은 사과문에 대해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호된 평가가 따르기도 한다.
너무 짧아도, 너무 길어도 문제가 되는 사과. 해도, 안 해도 욕을 먹을 것 같은 사과. 그렇다면 정확하게 사과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또 어떻게 사과하는 것이 옳고, 어떻게 사과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체면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앞서 이야기했듯 사과의 상황과 성격은 맥락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에 사과는 각각의 상황 맥락에 따라 그 내용과 성격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분명하다면, 다음과 점을 반드시 고려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 인정하는 부분과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사과받는 사람의 입장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통 사과를 하고도 더 큰 비난을 받는 경우는 그 사과의 범위가 사과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이다. 나는 A만 사과를 하고 싶은데, 받고자 하는 이는 A는 물론이고 B까지, 또는 A가 아니라 B에 대해 사과를 받고 싶어 한다면, 이는 사과 이전에 충분히 조율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사과에 따른 책임에 대해서도 사과를 받아야 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는 잘못의 책임에 대한 인정 그 자체가 중요한 사안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에 따른 행동이 어떻게 구체화될 것인지가 중요한 일도 있다. 따라서 사과가 진정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사과의 대상이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책임과 보상이 고민되어야 하며, 그러한 고민의 과정과 결론이 사과 안에 명시되어야 한다.
즉, 사과는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다. 갈등을 종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갈등에 대하여 의사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해가는 과정 자체가 사과여야 하며, 따라서 사과하는 말에 앞서 무엇을 사과할 것인지, 책임에 대한 인정의 범위를 조율하고 논의하는 과정, 또 보상 및 책임에 대한 고민과 결정을 의논하는 과정 자체가 ‘사과’라는 언어 행위 안에 포함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과하세요’라는 말은 갑에 의한 을의 굴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말이어서는 안 되며, 우리가 봉착한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당신과 대화하고 싶다는 말, 그렇게 대화를 붙듦으로써 이 관계를 포기해버리지 않겠다는 말,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봉착한 문제들을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다는, ‘말의 힘’을 믿는다는 희망의 고백이어야 한다. ‘사과하고 싶습니다.’ 역시 그러할 것으로, 그러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글. 김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