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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l 01. 2022

숙녀처럼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하기

저는 에세이를 주로 쓰는 작가입니다. 그전에는 10년간 직장 생활을 했고요, 지금은 글 쓰거나 말하는 걸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강의 내용은 매번 다르지만 글쓰기를 가르칠 때도 있고, 출간한 책을 바탕으로 학생이나 직장인에게 동기부여 강의를 할 때도 많지요. 강의를 하고 나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작가님은 말씀을 참 잘하세요.” “신기할 정도로 귀에 쏙쏙 들어와요.” 강연 전문 미디어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의 대표님은 제 강의를 촬영하고 난 뒤 유튜브 영상을 제작해주겠다며 ‘정문정답’ 진행을 제안해주었죠. 

경상도 출신인 제겐 여전히 사투리 억양이 남아 있습니다. 전문 강사도 아니고, 표준어를 쓰는 사람도 아닌데 말을 잘한다는 칭찬을 듣는 게 어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말을 잘하는 비결이 뭔가요’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받게 되며 저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말을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건 일단 주변을 떠올려봐도 확실했습니다. 그럼 글을 많이 쓰다 보면 논리력이 길러져 말을 잘하게 된다고 할까? 그 또한 아니라는 증거들이 명백했지요. 실천 가능하고 현실적인 답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질문 앞에서 대충 대답할 수가 없었거든요.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빛과 마이크를 꼭 잡은 손에서 보였어요. 타인 앞에서 말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요. 생각하는 바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요. 

자기표현의 주요한 방식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법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건, 2021년 즈음해서 화제가 되었던 <SNL 코리아>의 주현영 인턴 기자의 연기 때문이었습니다. 디테일이 넘치는 연기력도 흥미로웠지만 그걸 보고 완전히 자기 이야기라고 공감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더욱 유심히 보게 되더군요. 주 기자의 어색한 표정과 떨리는 말투,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 감정적 대응을 하거나 적절치 않은 표현을 써버리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대학생 시절이나 신입사원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또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후배들의 모습을 연상하기도 했죠. 그런데 그건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없어서 하게 되는 행동이 아닙니다. 보란 듯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떨고 있는 걸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습니다. 저는 주 기자에게서 흠 잡히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를 봤어요. 주 기자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기에 초보적 실수를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SNL 코리아> 방송 화면 (출처: 쿠팡플레이)

실제로 주현영 씨는 주 기자를 연기하기 위해 <대학토론배틀>에 나오는 대학생들을 참고했다고 말했습니다. 토론을 잘하고 싶어 하는 대학생의 어투를 따라 하다 보니 몸이 저절로 긴장되더라고 그는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목소리를 유지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까 정말로 성대 근육이 경직되더라고요. 숨도 잘 안 쉬어지고요.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있다 보니까 가짜 목소리를 만들게 되고, 몸이 굳어지고, 떨렸어요. 눈물도 났고요. 도태되면 안 된다는 마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경직 상태가 유지되는 거죠.” 전문가처럼 보여야 한다는 각오,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 공격을 받느니 먼저 공격하겠다는 방어적 생각이 타인 앞에서 오히려 취약해 보이는 모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획안도 망치는 말하기


제 경우에는 제대로 말하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크게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이고, 두 번째는… 두 번째 계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요. 일단 첫 번째 계기부터 이야기해보면, 직장 생활을 할 때 회의가 참 많았습니다.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회의를 했던 것 같아요. 동기들이나 선후배와 회의할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팀장님이나 대표님이 동석한 회의에서는 평소 하던 수준의 절반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겁이 나서 그랬던 거였죠. 극도로 긴장하면 호흡이 거칠어지고, 호흡이 망가지면 숨이 차면서 남이 듣기에 덜덜 떠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편안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대부분 상대의 호흡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제 능력이 과소평가되는 듯해 억울했습니다. 기획안이 통과되지 않는 날이면 더욱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들었죠. 긴장하게 되니 제대로 말할 수 없고 그 때문에 말하기가 부정적인 경험으로 남아 후에 비슷한 상황에서 크게 긴장하는 악순환. 

사내에서 전달력이 좋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관찰했습니다. 말하는 게 업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도 유심히 들어보았죠. 특히 배우들은 발성 하나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니 전문적으로 연기를 가르치는 책과 영상을 찾아보았는데요, 이처럼 언어 표현을 가르치는 곳에서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호흡의 중요성이었습니다.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와 명확한 발음도 중요하지만 가장 최우선은 호흡이라는 겁니다. 편안하게 숨 쉬는 것. 상황에 몰입한 뒤 긴장을 최대한 풀고 상대와 자기 자신을 믿는 상태로 겸손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서 호소력 있는 말하기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긴장하게 되면 ‘안녕하세요정문정입니다’라고 쉬지 않고 내뱉게 됩니다. 그러면 그다음부터 숨이 찬 상태로 자꾸만 말을 하게 되어 스텝이 꼬이기 시작하죠. 말소리가 듣기 좋고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는 사람들은 ‘안녕 / 하세요 // 제 이름은 / 정문정입니다//’라고 쉬어야 할 때 충분히 쉬면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 앞에서 특히 더욱 길게 쉬어갑니다. 아나운서나 성우, 배우 들이 말하는 걸 주의 깊게 들어보세요.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맞춰 호흡을 영리하게 조절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될 겁니다.  


떨릴  떨린다고솔직하게


호흡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뒤부터 복식호흡을 하는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요가와 수영도 큰 도움이 되었죠. 하루에 30분 이상 산책을 하면서 호흡을 깊이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는 연습을 계속 해나갔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대본처럼 써본 뒤 쉬어갈 곳을 확인하며 읽어본 적도 많아요. 이처럼 편안한 호흡만 제대로 연습해도 말하기의 기본기가 단련됩니다. 호흡을 통해 긴장을 풀고 이완하는 연습만 해도 말하기에서 중요한 절반은 완성한 거예요. 

일러스트: 최산호

여성과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평생 일한 긴즈버그 대법관의 책 <긴즈버그의 말>에는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어머니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숙녀가 되어라.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라. ‘숙녀가 되라’는 것은 분노처럼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감정에 굴복하지 말라는 뜻이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차분하게 말해야 한다.” 어린 여자처럼 말한다는 표현은 오랫동안 여성 비하적 의미로 쓰여왔지만 이 책에선 ‘숙녀처럼 말하라’는 표현을 통해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자기의 감정을 차분히 조절하라는 것이죠.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게 하고 자신을 타인의 눈으로 평가하게 하게끔 하는 메시지인 ‘유려하게 말하겠어’ 대신 ‘차분하게 말하겠어’로 다짐을 바꾸어야 합니다. 말할 때 과도하게 긴장하는 사람들은 평소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말하는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그럴수록 편안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늘려갈 필요가 있죠. 말하기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이 늘어나야 하는 겁니다. 경청해주는 사람과 대화하는 경험을 자꾸 해봐야 하고 내가 표현한 내용에 대해 동의받는 경험을 해봐야만 습관적 긴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주는 사람을 주변에 늘리려면 내가 받고 싶은 대우를 먼저 남에게 해줘야 하는 게 기본이고요. 말하기가 왜 그렇게 무서운지 생각해보니, 저는 관련해서 긍정적인 기억 자체가 별로 없었어요. 가족과는 대화가 길어지면 꼭 말싸움으로 이어졌으니까요. 어떤 말을 했을 때 공감받기보다 공격받은 기억이 더 많았으니까요. 때문에 저는 자꾸만 방어적으로 말해왔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설득력을 주지 못할 거라는 걸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됐어요.

이제 저는 말을 하기 전 떨릴 때면 마주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시작합니다. “오늘 제가 너무 잘하고 싶은가 봐요. 이상하게 많이 떨리네요.” 제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밝히면 상대는 한결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줄 때가 많습니다. 속으로 떨고 있다는 걸 밝히면 신기하게도 긴장이 덜 되어서 이 말을 내뱉은 뒤부터 괜찮아지는 경험도 많이 했어요. 말하기는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것을 나누는 상호작용이라는 것, 제대로 하지 않으면 끝장이라는 절박감을 느낄 때마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달래주는 것, 서두르지 않고 충분한 호흡을 해나가는 것,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도 정말 괜찮다는 걸 아는 데서 정확한 말하기는 시작된답니다. 


글. 정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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