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읽은,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야기 한 토막.
어느 마을에 효자가 살았다. 나이 드신 어머니가 병이 들었는데,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약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효자가 자기 허벅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먹여 드렸다. 하늘이 감동해서, 어머니의 병이 나았고, 효자네 집도 잘 살게 됐다.
비슷한 이야기를 텔레비전으로도 접했던 것 같다. 당시는 1980년대였고, 충과 효 같은 봉건적인 가치관이 방송에서 어색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린 생각으로도 영 이상했다. 그토록 가난한 집안이라면, 평소 제대로 먹지 못해서 몸이 비쩍 말랐을 텐데, 베어낼 만한 허벅다리 살이 있기나 했을까? 소독약도 없던 시절에, 허벅다리 살을 잔뜩 베어내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머니가 알면 놀라서 병세가 더 악화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조선 시대 사람들은 상투 자르기도 격렬히 반발했는데, 허벅다리 잘라낸 이야기는 왜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
그리고 잊고 지냈다. 한참 뒤 머리 굵어진 뒤에야 알게 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뒤, 조선 사회는 성리학 원리주의 사회에 가까워졌다. 양반 상류층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이들까지 성리학 이념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온갖 종류의 과장된 효자와 열녀 이야기가 마을마다 넘쳐나게 됐다. 그중 일부가 현대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집권 세력 구미에도 맞는 내용이었으므로, 어린 내가 책이나 방송으로 만나게 됐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왕은 도성을 버리고 국경까지 도망갔다. 병자호란 때는 평소 경멸하던 만주족의 칸 앞에서 왕이 직접 차가운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절을 했다. 전쟁 통에 숱한 여성들이 성폭력을 겪었고, 낯선 땅으로 끌려갔다. 당연히 체제 정당성이 약화된다. 그 반작용으로, 혹은 지배 엘리트의 자격지심이나 콤플렉스 때문에, 생활 세계에선 봉건적인 가치관이 전보다 더 강조됐다.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이 더 강화됐다. 대략, 이렇게 설명이 됐다. 나도 그런가 보다 했다.
다시 시간이 지났다. 또 새로운 설명을 듣게 됐다. 대단한 엘리트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이들이 자신을, 혹은 자기 부모를 극진한 효자로, 혹은 목숨을 걸고 정절을 지킨 열녀로 포장하게 된 현상은 단지 조선 후기의 이념적 억압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다. 요약하면 이런 설명이다.
윤리적 실천도 어쩌면 사치재다.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안다는 말이 괜히 유행한 게 아니다. 성인군자가 아닌 보통 사람은 먹고살 만해야 윤리적 실천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조선 사회에선, 윤리적 역량이 곧 정치의 자격이었다. 누군가가 윤리적이라는 보증은 그가 권력을 누려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현대에도 비슷한 현상은 나타난다. 하지만 왕을 포함한 모든 정치인이 성리학자였던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다. 조선의 정치인들이 치열한 정쟁의 한복한판에서 끊임없이 내가 군자이며 어진 사람이라는 점을 입증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적보다 내가 더 유능하다거나, 정적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싸우는 일은 드물었다. 나 혹은 우리 편이 더 유능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더 윤리적이라는 점을 확인받아야 권력 지분을 더 많이 갖는 구조였다.
이런 사회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평민이나 여성이 남성 양반 엘리트도 따라 하기 힘든 윤리적 실천을 했고, 그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이는 그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평민이 양반 정치인의 권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다. 윤리는 사치재인데, 윤리는 권력의 자격인데, 그 귀한 윤리를 평민과 여성이 소비하기 시작한 것 아닌가.
실제로 조선 성리학자 가운데 일부는 이른바 열녀의 정절을 칭송하면서도, 열녀와 충신을 같은 반열에 놓기를 꺼렸다. 여성의 윤리적 실천을 남성 충신의 행위와 묶어서 이야기한다면, 이는 여성이 권력에 다가갈 자격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당대 권력에서 소외돼 있던 누군가에겐 당대의 윤리에 더 충실한 모습을 연출하는 게 치열한 정치 투쟁이었다. ‘왕에 대한 충성심은 내가 더 지극한데, 왜 나는 조정에 나갈 기회를 얻지 못하는가.’ ‘나는 효자인데, 혹은 나는 열녀인데, 왜 나의 윤리적 실천은 왕에게 대한 충성보다 낮은 대우를 받아야 하나. 이것은 왜 윤리가 아닌가. 윤리에도 종류마다 서열이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소외된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자신들을 소외시켰던 체제의 윤리를 더 적극적으로 내면화했다.
이쯤에서 다시 떠올려보는, 옛 이야기 하나. 역시 어릴 때 읽은 소설 <홍길동전>이다. 홍길동은 좌의정의 얼자로 태어났다. 본부인의 자식을 적자, 양인 첩의 자식을 서자, 천인 첩의 자식을 얼자라고 했는데, 이들 서자와 얼자, 즉 서얼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던 시절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홍길동은 왜 아버지와 형을 아버지와 형이라 부르지 못하느냐며 서러워했다. 재주가 뛰어났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결국 그 역시 권력의 일부가 된다. 잠깐이지만 병조판서가 됐고, 율도국의 왕이 됐다. 자신을 차별했던 조선 사회와도 화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씁쓸한 내용이다. 적자와 서얼의 차별에 분노했다면, 신분 차별 자체를 없애자고 해야 옳다. 하지만 소설과 역사 모두 내용은 반대였다. 신분 차별 자체는 유지하되, 나는 상위 신분에 포함시켜 달라고 했다. 서자 역시 아버지는 양반이니, 서자에게도 양반 대접을 해달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다른 이복형제처럼 평민 위에 군림할 수 있게 해달라.’라는 요구다. 이는 평등이 아니다. 평등이란, 나도 상위 계층에 포함시켜 달라는 요구가 아닌, 계층에 따른 차별 자체를 없애자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조선 후기, 숱한 평민이 양반의 윤리를 양반보다 더 치열하게 따르느라, 제 허벅다리 살을 베어냈다. 물론 이 같은 설화 가운데 대부분은 가짜였을 게다. 하지만 양반에 대한 동경과 콤플렉스 때문에 자기를 해쳐가면서까지 양반 흉내를 낸 평민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장 끼니를 걱정하는 집이 무리하게 제사를 지냈던 풍속도 그래서 생겼다. 이들에겐 몸은 평민이어도 마음만은 양반이고 싶었던, 어쩌면 평등의 요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 평등이다. 양반의 윤리를 더 치열하게 따른 덕분에 양반 대접을 받는 이들이 늘어난다고 한들, 누군가는 양반에게 차별받는 신세로 살아간다. 홍길동의 어머니 같은 천민 입장에서, 양반 흉내 내는 이들이 많아진 상황은 그저 차별의 총량이 늘어난 것일 뿐이다. 지금도 비슷한 풍경을 가끔 본다. 기득권 언저리에 있는 이들은 종종 한탄한다. 나도 충분한 자격이 있는데 왜 기득권의 핵심에 들지 못하고 언저리에만 있느냐고. 나도 알고 보면 기득권 세력의 일부라고. 이런 한탄과 절규가 쌓이면,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의 범위가 늘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기득권층과 나머지 사이의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도 양반 대접 해주시오.’라는 요구가 넘쳐났고, 실제로 양반 숫자가 늘었지만 결국 신분 없는 사회에 다다르지 못하고 망해버렸던 조선의 역사가 잘 보여준다. 평등은 오로지 평등의 요구로써만 가능하다. ‘나도 기득권 안에 넣어주시오.’라는 요구는 평등이 아니다. 기득권과 나머지 사이의 차별을 없애자고 할 때만, 평등에 가까워진다.
글. 성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