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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l 01. 2022

어느 영화 노동자, 10년을 일해 얻은 것

꼭 1년 만의 재회다. 지난해 5월, 제주 강정 마을에서 만난 친구들과 다시 그곳에서 모였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 셋, 영화제에서 일하는 사람 하나, 영화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 하나, 그렇게 다섯. 영화 덕분에 알게 된 사람들이다. 지금은 잠정적으로 문을 닫은 영화제의 한 시기를 함께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서로 알고 지낸 지는 오래라지만 모르긴 몰라도 서로 간의 가까운 정도는 달랐을 것이다. 그런 건 고려의 축에도 끼지 못하고 우리는 어느새 사사로운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한 번이면 이벤트였다고 할 텐데, 두 번째 제주행이고 보니 이 만남이 주기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여러 번 해봐야 알 수 있는 게 있는가 하면, 한 번만 해봐도 감이 딱 오는 게 있지 않은가. 영화제를 함께 만든다는 건 실은 겪어본 사람들만 아는 어려움이 있다. 겉으로 다 드러나지 않는 일들을 침착하고 빠르게 마무리해야 하는 일투성이다. 큰일을 치르고 나면 일단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다. 당분간은, 한동안은 보지 말자고 하다가 끝까지 안 보고 사는 경우가 왜 없겠는가. 상처가 깊고 아파서 아물 시간이 필요한데 아물었다고 생각하고 막상 다시 보면 그때의 통증이 되살아나 힘든 관계가 왜 없겠는가. 애써 외면해온 이름들이 있고, 서둘러 기억에서 지워낸 얼굴들도 수두룩하다. 그런데 다섯이 있다. 그리고 1년 만에 다시 제주에서 모였다. 귀한 기쁨이다.

지난해 모였을 때 추진력 좋은 A의 제안으로 서로를 이름으로만 부르기로 했다. ‘~감독님’, ‘~평론가님’ 같은 호칭을 없애고 그렇다고 요즘 많이 쓰는 ‘~님’, ‘~씨’도 아닌 이름이거나 본인이 원하는 닉네임이면 좋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어색해 웬만해선 서로를 부르지 않고 대화를 시작하곤 했는데 웬걸. 이번에는 만나자마자 이름이 착착 입에 붙는다. 그렇게 부르다 보니 괜스레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다. 우리들 사이에 이견은 있을지언정 서로를 힘겨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서로를 향한 존중, 적절한 거리 감각, 당신이 하는 말을 들어보겠다는 의지와 이해의 언어가 있었다. 밀양 송전탑,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목소리, 제주 강정 마을 해군 기지 건설과 비자림 숲 개발을 향한 문제 제기, 하청 업체 해고 노동자들의 외침과 촛불 시민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시선이 그들의 영화가 됐던 것과 비슷한 것일까. 직업의 특성상 전국을 누벼야 하는데도 늘 짐 꾸러미 한쪽에 제 몫의 텀블러를 잊지 않고 들고 다니는 사람, 투쟁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투쟁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활동’을 하면서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는 사람, 제주를 둘러싼 문제를 제 삶의 철학으로 삼아 아예 제주로 와 정착한 지 8년째를 맞은 사람,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그들이 직접 영화를 만들 수 있게 교육하는 일을 하는 사람. 그들 앞에서 ‘삶과 예술은 한 몸’이라는 식의 거창한 말은 오히려 앙상하다. 영화를 만드는 것과 일상을 돌보는 일을 분리할 줄 알면서도 영화를 만드는 감각과 생활을 꾸리는 감수성이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목격하게 하는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의 영화와 그들의 일상으로 ‘여기, 사람이, 동물이, 식물이 있다’는 걸 배운다. 


다시 찾은 제주에서 우연과 모험 되어라


그런 동료들과 다시 찾은 제주다. 다들 바쁜 일정을 쪼개고 쪼개 틈을 낸 것이다 보니, 2박 3일 여행 가운데 다섯 명이 다 같이 모이는 날은 하루뿐이었다. ‘일정이 왜 이렇게 됐느냐.’고 누굴 탓하는 일 하나 없이 ‘이렇게라도 모이겠다고 한 게 대단하다.’며 웃는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끼리는 그것대로 좋았고, 뒤늦게 합류한 사람은 그것대로 반가웠다. 다섯이 된 날은 온종일 걷고, 웃고, 떠들고, 먹고, 마셨다. 조천 바닷가를 걸을 땐 불어오는 바람에 까르륵거렸고 선흘곶자왈로 들어서서는 숲의 정령이라도 된 듯 말없이 나무와 덩굴을 보고 느끼며 나아갔다. 그러다 B가 제주의 숲과 나무를 촬영하며 알게 된, 바위 위에 사는 지의류(地衣類)의 존재를 알려준다. 한자 풀이를 해보자면 땅이 입는 옷, 옷을 입은 땅 정도가 될까. 그동안 이런 유를 본 적은 있었지만, 그저 바위 위에 흙먼지나 이끼가 아닐까 지레짐작하고 말았던 것 같다. 

단 한번도 제대로 눈길을 준 적이 없었는데 친구의 말에 다시 보니 뭔가가 그곳에 있었다. 지의류는 녹조류나 남조류가 균류와 공생하는 복합 유기체라고 했다. 북극의 툰드라, 사막, 화산암 같은 곳에 퍼져 있는 아주 강인한 장수 생물이다. 어쩌면 지의류의 생존과 작용으로 제주의 땅과 숲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는 동료의 말에 우린 이미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다. 게다가 이 작디작은 지의류에 깨알보다 작은 까만 눈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 큰 어른 다섯이 지의류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검은 눈을 보겠다고 한다. 보슬비를 맞으며 나무와 돌을 보며 함께 감탄했던 그날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우연과 모험’이라 부르기로 했다. 모임 이름 말이다. 술 한잔을 기울이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우연과 상상〉에 관한 얘기가 자연스레 나온 게 시작이었다. ‘살면서 마주치는 우연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인생에 사달이 나지 않겠는가, 우연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삶의 우연을, 우연의 삶을 받아들이며 살고 싶다, 그러려면 ‘상상’을 행하는 ‘모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런 대화 끝에 ‘우연과 모험’이 됐다. 1년 후도 멀다. ‘우연과 모험’은 애초부터 계획하고 조직된 게 아니니 마음 가는 대로 행해보자. 돌아오는 여름, 부산에서 만날 일을 모의했다. 다섯 중 하나가 만든 영화를 부산에서 상영하니 시간이 맞으면 그때 다시 부산에서 보면 좋지 않겠는가. 다들 그러겠다고 한다.


우연모험산다감각경험.


기회가 될 때마다 말해두고 싶었다. 10년 넘게 영화 일을 하며 얻은 건 무엇일까? 내게 남은 건 뭔가? 이 질문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그건 영화를 보는 예리한 눈이나 누가 읽어도 수긍할 만한 글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라고. 영화가 내게 내준 너른 품이다. 영화를 만들거나 상영하거나 영화에 관해 말하고 쓰며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를 ‘한다’는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친구들 덕분이다. 그들 곁에서 세상을 보는 나의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다. 내 세계 너머에도 세계가 있음을, 내 세계 안쪽에도 나조차 몰랐거나 부정했거나 외면했던 세계가 있음을 그들의 영화와 이야기와 일상을 통해 새삼스레 알게 된다. 그들의 목소리와 활동이 나를 둘러싼 안팎의 벽과 경계를 두드리고 틈을 내준다. 내 세계가 이렇게나 작다는 사실을, 내 마음의 옹졸과 옹색을 직시하게도 된다. 

좋은 것을 좋다고, 사랑스러운 걸 사랑스럽다고 말로 전하는 법을 배운다. 집은 ‘나만의 공간’이라는 생각에 누구도 쉽게 들이지 못했는데, 조금씩 사람들도 초대해본다. 동물을 무서워하던 내가 친구들의 반려동물들과 만나며 동물과 눈을 맞추고 대화를 시도하고 쓰다듬기까지 한다. 나도 반려인의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느냐 한다. 식물을 죽일 줄만 알았지, 살리는 법을 몰랐는데 햇수로 3년째 내 곁에 있는 선인장을 본다. ‘함께 산다’는 감각과 경험이야말로 지난 10여 년의 시간을 보낸 뒤에 얻은 것이다.

다시 써본다. 우연. 모험. 산다. 감각. 경험. 하나하나가 반짝거린다. 이 단어들을 가만히 입속에서 어루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얼마간은 괜찮을 것 같다. 


글과 사진. 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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