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붐은 온다! 하지만, 어떻게?
‘추앙’이라는 단어를 2022년 유행어에 등재시킨 화제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여기에 탱고가 언급됐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무려 1회 시작부터 언급됐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내용도 별로 긍정적이진 않았지만(회사에서 주인공과 그의 동료들이 동호회 활동에 대해 수다 떠는 중 나온 말.) “나 탱고 동호회 갔다가 기겁한 게 가까이서 숨소리 다 들리고, 숨소리는 왜 이렇게 크니? 부장님 어깨에 손을 얹는데 손이 후끈후끈 축축해. 엘베에 부장님 타는데 나도 모르게 순간 뒤로 물러나게 되는 거 있지?” … “너희 동호회는 연령대 어떻게 되니?” “거의 40대야.” 이 드라마에 언급된 탱고 장면을 보고 실제의 탱고인들은 흥분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기쁨은 크다. 심지어 그걸 대중매체에서 다룬다? 반갑고, 어떻게 그렸는지 궁금하고, 내심 기대도 생긴다. 이 기회로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끌게 될 수도 있다는 기대다.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 실제로 2011년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에서 탱고를 주요 소재로 다뤘을 때 한국 사회에 탱고 붐이 일었다고 한다. 남녀노소 탱고를 배우겠다는 사람들로 전국의 탱고 아카데미가 복작대고 들썩였으며, 새로 진입하는 청춘들은 탱고 씬에 활력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진입한 사람들이 지금도 이 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동호회 단체 채팅방에서 탱고 동호회의 연령대가 높다는 <나의 해방일지>의 대사를 두고 “묘하게 고증 잘됐음ㅋㅋㅋㅋ” “뼈 맞았네ㅠㅠ” 같은 웃픈 반응이 나온 것은 묘하게 침체된 분위기를 탱고인들이 감지한다는 방증이다.
이런 맥락에서 탱고가 중요한 소재로 다뤄지는 드라마가 새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반갑다. 인정받는 전문 탱고 댄서들이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여자 주인공이 탱고 댄서로 나오는 작품. 6월 1일 방영을 시작한 tvN 드라마 <이브>이다.
탱고인들은 설렜다. <여인의 향기>가 만든 과거의 영광, <이브>로 다시 오는 것 아닌가? 나도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하지만 2회(원고 마감일 기준 방영된 회차)까지 본 결과, 이 드라마로 탱고 붐이 크게 오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탱고가 평범한 사람이 조금만 발 뻗으면 일상에서 배우고 즐길 수 있는 취미 생활이라 생각하는데, 여기서의 탱고는 그렇지 않다. 전문 탱고 댄서들이 참여한 만큼 멋진 탱고 씬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멋진 탱고’는 오직 독기 품은 주인공의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 묘사된다.
탱고에 대한 선입견
“당신 설마 여기서?” “탱고의 뜨거운 에너지 때문에 도저히 못 참겠어.”
주인공 라엘(서예지)이 여성 공연자 대기실에서 남편과 정사를 벌이기 전 오가는 대사다. 당혹스러워하는 쪽이 남편, 못 참는 쪽이 라엘이다. 탱고 추는 사람으로서 주인공의 대사에 크게 공감되지 않았다. 내 경우 탱고를 ‘뜨겁게’ 추면 그 자체로 만족스럽던데. 오히려 피곤해져서 집에 가서 쉬고 싶고 빨리 잠들고 싶던데….
어떤 맥락에서 저 장면이 나왔는지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해본다. 가족사의 아픔이 있는 라엘은 긴 시간 공들여 복수를 설계한다. 복수의 대상 중 하나인 ‘회장님’이 탱고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무 시절 향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조사하고 탱고와 반도네온을 배운다. 이에 더해 자신의 아이를 회장님의 아이와 같은 영재예술 유치원에 입학시킨다. 입학식 겸 자선모금 행사에서 탱고를 추며 ‘그윽하게’ 회장님을 바라보고, 일부러 액세서리를 회장님 앞에 떨어뜨려 따라오게 만들고(<헨젤과 그레텔>인 줄),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기실에서 남편과 정사를 벌이며(앞서 설명한 장면이다), 그가 잡고 있는 술잔 위로 손을 포개는 등의 유혹을 이어간다.
tvN 드라마 <이브> 포스터전반적으로 ‘막장’의 냄새가 많이 나는 드라마다. 그리고 탱고는 막장의 향취를 더 짙게 만드는 재료로 활용된다. 치명적이고 고혹적이며 성적인, 일상과 멀리 있는 무언가. 이것은 탱고에 대해 널리 퍼진 인식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혹과 매혹의 춤, 탱고. 이것은 탱고 댄서를 그리는 데에도 반영돼 드라마의 주인공 라엘은 성적으로 적극적이고 매혹적이며 어딘가 신비로운 여성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이것이 탱고와 탱고 댄서를 타자화하는 시선일 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화되거나 신비화된 방식으로 그려진 ‘너무나도’ 치명적인 탱고, 심지어 춤과 섹스를 직접적으로 연결 짓는 연출까지(춤의 흥분과 기쁨은 섹스에 ‘비유’할 수 있지만 등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재현이 반복될수록 탱고에 대한 대중의 오해는 쌓이고, 탱고에 진입할 관문을 좁히고 높이는 것 아닐까? 걱정된다. <이브>를 보고 탱고에 대한 그릇된 기대를 가진 회장님, 부장님 들만 잔뜩 탱고 아카데미에 오시는 것 아닐지….
<여인의 향기>에서의 탱고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에서의 탱고는 달랐다. 주인공은 담낭암 판정을 받고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젊은 여성 연재(김선아)이다. 비록 암 판정을 받은 점은 평범하지 않지만, 그의 일상이나 감정은 보편적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다.
그는 암 판정 뒤 남은 인생을 즐기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오키나와로 여행을 간다. 그곳에서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동시에 가슴 무너지는 일도 겪는다. 그때 탱고가 그를 위로한다. 이때 등장한 오키나와의 석양 속에서 탱고 추는 장면에는 두고두고 잔상으로 남을 따뜻한 아름다움이 있다.
연재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20가지’를 작성하고 ‘탱고 배우기’를 3번에 올린다. 연재가 찾은 탱고 아카데미를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 지욱(이동욱)과 소꿉친구이자 주치의 은석(엄기준)도 찾아오고, 그들의 감정이 탱고 수업과 연습 장면을 통해 드러난다. <여인의 향기>의 간질간질하고 애틋한 탱고 씬들은 바로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이 밖에 은석을 축으로 닉네임을 쓰고, 뒤풀이를 하고, 발표회를 여는 한국의 탱고 동호회 문화가 친근하게 그려진다는 점이 좋았다. 뛰어난 의사지만 싸가지는 없다고 소문난 은석이 탱고를 추며 변하고, 탱고 공연까지 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며 풋풋함과 성취감을 보는 이에게 전한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다. 춤 좀 춰본 사람이라면 일하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혼자 스텝 밟는 연습을 하는 은석에 크게 공감하며 웃을 것이다.
<여인의 향기>에서의 탱고는 낯설고 먼 것이 아니다. 약간의 벽은 느껴지지만 마음만 먹으면 우리 일상에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취미이다. <여인의 향기> 제작진은 추앙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탱고를 충실히 존중하며 다뤘다. 나는 믿는다. 이처럼 존중을 갖추고, 한국의 탱고 문화를 친근하게 그려내는 영화나 드라마가 또다시 등장하고 흥행한다면? 탱고 붐은 온다, 또 한번! 하지만 그날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글. 최서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