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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06. 2022

창작할 가치가 있는가?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정말이지 가지가지 하고 살았다. 1인 잡지를 창간하고, 보드게임을 만들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단행본 몇 권을 홀로 혹은 공동 저술로 펴냈다. 내 나름대로 자긍심을 느끼는 일들이지만, ‘커리어’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도통 매체와 장르에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적어도 내 안에는 일관된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창작자라는 정체성 말이다.

하지만 최근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창작을 ‘계속’ 해야 창작자 아닌가? 근 몇 년간 이렇다 할 작품을(여러 협업 프로젝트에는 참여했지만 여기서는 나의 화두를 세상에 던지며 나 자신을 오롯이 쏟아부은 결과물을 말한다) 창작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창작자라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혼란스럽고, 내가 ‘전문적인’ 무언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출처: Unsplash


창작하지 않는 창작자


다른 창작자들은 어떤지 알고 싶어 데이비드 베일즈와 테드 올랜드의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를 들여다봤다. 여러 와 닿는 대목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이 문단을 공유하고 싶다.


작가 헨리 제임스는 예술가의 작품에 대하여 제기할 수 있는 생산적인 질문 세 가지를 전한 바 있다. 첫 두 질문은 천진할 정도로 정직하다. 즉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공했는가?”이다. 그리고 재기 넘치는 세 번째는 이것이다. “창작할 가치가 있었는가?”


내가 세상에 발표한 작품을 돌아보게 된다. 당시 가치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창작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와서는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어떻게 그렇게 단단한 확신과 뜨거운 열정을 가졌을까?

보드게임 <수저게임>을 만들었을 때를 떠올린다. 2015년 한국 사회에 수저계급론이 대두된 뒤의 일이었다. 수저계급론에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고 계급 격차가 날로 격하게 벌어지는 현실에 대한 흙수저의 자조가 묻어 있었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한 것은 이에 대한 공감과 이해 없이 “지금 부모 욕하는 거냐?”라는 식의 방어적 태도를 앞세우거나 “충분히 노력은 했고?”라며 개인 탓을 하는 일부 어르신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하니 또 열받네…?

한 편으로는 자조와 분노만으로 시스템을 개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저게임>을 기획·제작하고 수차례 워크숍을 진행한 이유다. 흙수저들이 더 나은 시스템을 위해 토론하고, 더 나아가 정치력을 갖춰 집단적 협상에 나서는 데 <수저게임>이 자극이 되길 바랐다. 그와 같은 목소리가 더 넓게 퍼져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이길 기대했다.

내 경우 마음을 움직이고 싶다는 욕망이 무언가를 창작하는 강한 동력이 될 때가 많았다. 2019년 공개한 다큐멘터리 영화 <망치>도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 만들었다. <망치>는 망원동 ‘참프루’와 서촌 ‘궁중족발’의 비극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산 증식, 물론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러나 아무리 자본주의 속 건물주라도, 세입자와 공생하며 이익을 추구할 수는 없는 걸까? 투자 잘하고 자산 증식을 해야만 삶의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사회’는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회 구성원이 다수라면 더 나은 체계와 문화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예술로 사람들의 의문을 촉발시키고 마음을 움직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창작의 열정이 한풀 꺾였다. 어쩌면 다 부질없는 짓일 수 있다는 의구심과 무력감이 고개를 든 것일지도 모른다. 자산 증식 열풍과 양극화가 오히려 더 심해진 것을 목도했다. 또한 내가 이런 것을 주장하고 작품을 만들 자격이 있을지도 고민됐다. 다른 누구의 마음을 움직이기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우선이 아닐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유혹에 약한 가볍고도 무른 나, 감정의 치달음을 참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을 끝내 상처입히는 나를 경험하며 개인의 성숙이라는 테마를 응시하게 됐다.

출처: Unsplash

다음 작품이 기존의 것보다 더 좋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창작에 몰두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리라 추측한다. 기존 작품들은 (운 좋게도) 타인으로부터의 호응과 인정을 받았는데, 다음 작품도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속 질문을 변화구로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다. “지금 떠올린 그 아이디어로 창작할 가치가 있는가?” 대답은 번번이 “아니오”였다.


(비시즌창작자에게 취미 생활이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지만, 탱고를 만난 뒤 적어도 불안은 상당히 누그러졌다. 탱고를 추고 있을 때는 특히나 그렇다.

탱고는 지금 이 순간 이곳에 몰입하게 만든다. 음악과 리드하는 상대에 몰두하며 내 몸의 움직임과 내 발이 딛고 있는 공간에 집중해야 탱고를 출 수 있고 그로써 열리는 감각이 있다. 그 시간이 지나도 남는 것은 무언가를 표현하며 해소한 뒤의 후련함과 계속 배우며 성장하고 있다는 만족감, 그리고 안정감이다. 아마 ‘탱고인’이라는 또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된 덕도 있을 것이다. 탱고가 준 안정감은 창작에 몰두하지 않는 ‘비시즌’의 불안감을 달래주고 흔들리는 자아를 받쳐줬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활동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발레 교습소에서 몸을 늘리고 근력을 키워 우아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때, 또 어떤 이는 눈감고 요가 수업을 들으며 마음의 평안을 느낄 때, 다른 누군가는 코레오 강습에서 거울 속 자신에게 몰두하며 격하게 땀 흘릴 때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물론 돈을 내고 ‘제대로’ 배우지 않더라도 취미는 누릴 수 있다. 반짝이는 한강 곁을 달리는 자전거, 푸르스름한 밤하늘 아래 조깅, 태블릿 PC에 끼적인 드로잉, 새벽에 써내려간 ‘감성 글’, 한 땀 한 땀 빚어 만든 ‘뜨개구리’… 무엇이 되었든 과정이 즐겁고 만족감을 얻는 일이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꼭 ‘예술’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 투박할지라도 말이다. 그래도 되는 게 취미 아닌가?

어떤 사람은 이런 시간을 사치라고 느낄 수 있다. 창작자의 불안과 다른 성격일 수 있지만, 경쟁이 심한 현대 한국 사회에 사는 대부분은 불안과 쫓기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필요한 게 취미 생활이라 생각한다. 나는 오직 ‘목표 달성’을 위한 시간과 ‘일’만 있는 삶이 좋은 삶이 될 수 있을지 의심한다. 기운 빠지는 하루의 끝에 나를 다독이고 일으켜주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또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느끼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일과 무관한 오직 즐거움을 위한 몰입의 시간, 권태에 빠진 삶에 생기와 즐거움을 불러오는 시간, 우리의 숨통이 트이게 만드는 시간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서 모순적이게도 나는 취미를 일과 엮고 있다. 지금 탱고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그 예다. 취미마저 ‘써먹을’ 궁리를 하는 내가 어찌 보면 좀 징그럽지만… 취미와 관련된 글을 쓰거나 유튜브 영상을 만드는 사람 수가 적잖은 걸 보면, 나만 이러는 게 아니지 싶다. 창작자의 정체성을 가진 이가 취미 생활을 하면 이렇게 되나? 

그리고 이건 어쩌면 탱고 탓(!)일 수 있다. 탱고가 내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고,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도우며 자꾸 자극했기 때문에, 그저 즐기는 대상으로만 남지 않고 얘기할 가치 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즐거움을 잃을 정도로 취미를 일에 불러오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적당히 하면 이것도 취미를 사랑하고 즐기는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리화하며 오늘도 탱고를 생각하고 글을 쓴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에서의 또 다른 대목을 공유하며 글을 맺겠다. 


오직 예술가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방대한 문제들과 화해함으로써 대가가 될 수 있다. 예술가는 항상 자신만의 작업을 모색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정신, 육체, 시간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공간을 확보해야만 한다. 경험이란 곧 유용한 공간을 제때에 쉽게 차지해 나갈 줄 아는 것이다.


글. 최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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