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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2. 2019

[에디토리얼] 물음표


편집장 김송희


<82년생 김지영>을 보다가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 장면이 있습니다. 하굣길 남학생에게 위협을 당하던 지영을 지나가던 여성이 구해주는 장면입니다. 지영은 도와달라고 먼저 요청하지 않았건만 그 여성은 가던 버스에서 내려 스카프를 흔들며 지영에게 달려옵니다. 아, 저는 그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도움으로 구원받았는지요. 말하지 않아도, 경험으로 느낌으로 제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먼저 스카프를 흔들며 달려왔던 여성들. 낯선 언니, 안 친했던 선배, 직장에서 만났던 여성 상사… 그들은 제가 도움이 필요한 길목마다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며 어둠에서 저를 일으켜 세워줬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여성들은 함께 손을 잡고 조금은 밝은 미래로 걸어왔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몇 년 전 저는 제가 쓴 글에 대해 ‘여성 혐오적인 글’이라고 독자에게 비판받은 적이 있습니다. 유행하는 대중문화 현상이나 미디어에 대해 풍자하는 유머 연재였던지라 어느 순간부터 ‘더 웃기고 자극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됐습니다. 페이스북에서 더 많은 ‘따봉’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웹에 쓰는 글은 어차피 휘발성이 강하니까 무조건 웃긴 게 좋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람이 부끄러운 일은 왜 그렇게도 빨리 잊는지, 그때 제가 썼던 글이 어떤 내용이었는지조차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당시 광고 속 날씬한 여성의 몸을 질투한다는 식의 글이었던 것만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굳이 제 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조목조목 비판한 메일을 보냈던 독자의 문장만은 생생히 떠오릅니다. ‘이름을 보니 여성 필자인데, 같은 여성이 왜 여적여 프레임으로 글을 쓰나요. 우리끼리 응원해줘도 부족할 판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식의 독자 피드백은 처음 받아봤던 저는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내심 어떤 문제의식조차 없이 웃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썼던 문장이 수치스러웠습니다. 더 많이 읽히고, 더 많은 따봉을 받고 더 웃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릇된 프레임을 답습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저는 유머러스한 글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유머를 발화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프레임을 이용하는 것이 간편합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 덕분에 저는 제가 ‘잘못했음’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호에서 만났던 <82년생 김지영>의 박혜진 편집자가 들려준 일화가 생각납니다. 조남주 작가와의 북토크에서 한 여학생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페미니즘을 말할 때마다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데 이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이미 데이터로 나와 있는 사회의 성차별 수치들을 가져와봤자 그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은 귀를 닫고 대화의 길을 막아버립니다. 아니, 처음부터 싸울 생각으로 일부러 그 주제를 꺼내는 남자도 있죠. 분위기가 불편해지고 나만 예민한 사람으로 치부되고, 누군가와 계속 싸워야 하는 일.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계속 말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고민합니다. 증거물이 있어도 가해자는 풀려나고, 피해자는 억울한 선택을 하는 일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성들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그 질문을 계속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결국 세상을 바꿉니다. 목소리를 내고, 잘못됐다고 말하고, 작은 일 하나에도 ‘그건 틀렸다’고 사회에 발신을 해야 합니다. ‘뭐 이런 작은 글 가지고 민감하게 굴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상대의 발신을 통해 무지함을 깨달았으니까요. 계속 목소리를 내고 물음표를 던집시다. 이게 맞는 건가요? 틀린 게 아니고 다른 거라고 뭉뚱그리는 사람에게 ‘아니요, 그건 틀렸어요.’라고 대답합시다. 《빅이슈》 216호 스페셜은 세상의 지영 씨들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앞으로도 《빅이슈》는 그 질문에 계속 동참하겠습니다.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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