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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밭골샌님 Mar 29. 2024

골목길 야생화 16 할미꽃

꼬부라진 할미꽃, 파파머리 할미꽃


할미꽃


앞 편에서 밝혔습니다만 11전인 2013년 봄과 가을, 매주 두 차례 의정부도서관에서 실시되는 '야생화 이야기' 강좌를 수강했습니다.
화요일 저녁은 이론, 토요일 아침은 현장 탐사.

당시 고교감선생님이셨던 이명호 선생님이 10년 이상 진행하셨어요.
무료인 데다가 수준이 매우 높아 3개월 코스 내내 60명 정도가 열심히 공부하는 '열공 모드'로 참석했더랬습니다.
남녀 성비는 3대 7 정도. 평균연령은 50대 후반쯤.
수강생 대부분이 사이버 동호회에선 내로라하는 고수분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토요일 현장실습은 주로 초보자들만 참가합니다.
열댓 명 정도가 어미를 좇는 병아리처럼 선생님 뒤를 따라다녔어요. 가까운 공원부터 근처 산과 계곡을 훑으며 풀과 나무의 이름, 그 특징들을 익히는 수업. 그러다 배고프면 옹기종기 모여 각자 싸 온 도시락을 나누는 소풍길이었습니다.

이 강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요.
올해는 다음 주 봄학기 개강을 앞두고 추가 모집 중이라네요.
40년 이상 야생화를 연구한 선생님의 열정.
20년 이상 이어오고 있는 재능기부 강좌.
그 열정과 봉사정신 자체만으로도 고개가 절로 숙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께 들었던 말씀 중 하나가 산에서는 묘지를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것. 무덤들 대부분이 야생화의 보고이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어느 산자락에 있든 묘지는 동남방을 향하고 있어 그 자체로 양지바르고 아늑합니다.
좌우로 널따랗게 펼쳐진 좌청룡 우백호는 바람까지 막아주지요. 주변에 키 큰 나무들을 베어 없애니, 햇빛이 가려질 염려도 없죠.
그래서 이른 봄, 키 작은 야생화를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곳이 무덤 근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덤가엔 조개나물, 양지꽃, 산딸기, 각시붓꽃, 타래난초가 무덤의 주인을 외롭지 않게 하려는 듯 피고 집니다.

양력 4월 5일 전후의 한식과 음력 8월 한가위가 묘지에 사는 식물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시즌입니다. 벌초 때문이죠. 

따라서 게으른 후손들이 관리하는 묘지는 야생화로서는 천하명당이 됩니다.

오늘 주인공은 할미꽃입니다.
무덤가에 핀 할미꽃, 너무나도 익숙했던 풍경이죠?


무덤가에 핀 할미꽃. 무덤가는 햇빛 좋아하는 양지식물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지금도 묘지에서 할미꽃을 만나 탄성이 절로 납니다. 봉긋이 솟은 무덤과 그 언저리의 꽃들은 순식간에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나 봐요.

화훼업자들이 일반인의 이런 정서를 그냥 둘 리가 없습니다. 요즘은 웬만한 공원이나 개인의 화단과 화분에서도 쉽게 볼 수 있어요.

도심에서 볼 수 있는 할미꽃 대부분은 제주도에 자생하는 '가는잎할미꽃'이라는데요. 원예화하기 쉬운 품종이기  때문이겠지요.


학명은 Pulsatilla koreana

영어로는 코리언 패스크-플라워(Korean pasque-flower).

우리나라가 특산 식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노고초(老姑草), 백두옹(白頭翁)으로도 불리는데요.

각각 늙은 할머니, 머리 흰 어르신이라는 뜻.

꼬부라진 채 꽃핀 모습과 꽃 진 뒤 백발 같은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밖에도 할미씨까비, 주리꽃, 고냉이쿨, 하라비고장 등으로 불렸어요.


꽃이 지고 난 뒤에는 흰 머리카락 같은 털이 달린 열매가 생긴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할미꽃에 얽힌 전설.

한겨울, 고개너머로 시집간 둘째 손녀를 찾아 길을 나선 할머니. 이미 첫째 손녀로부터는 문전박대를 당했죠.

손녀가 사는 집이 바라보이는 고갯마루에서 그만 하얀 눈을 맞은 채 얼어 죽고 말아요. 뒤늦게 발견한  둘째 손녀 내외가 무덤을 만들지요. 이른 봄, 그 무덤에선 꼬부랑 할머니 같은 꽃이 피어났대요.


서양에선, 십자군 전쟁참전했던 한 사제가 예수님이 못 박혔던 현장의 흙을 옮겨놓은 땅에서 이 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해서 '부활절 꽃'이라고 부른답니다.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잎이 달린 잎자루가 길어요.
5개의 작은 잎으로 된 깃꼴겹잎입니다.
작은 잎은 길이 3~4cm. 3개로 깊게 갈라져요.
꼭대기의 갈래조각은 너비 6~8mm로 끝이 둔해요. 전체에 흰털이 빽빽이 나서 흰빛이 돕니다.

할미꽃 내부에는 털이 없다. 황금빛 수술이 가운데 암술들을 둘러싼다. 이 각도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할미꽃보다 더 몸을 낮춰야 한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꽃은 4~5월에 핍니다.
붉은빛을 띤 자주색. 꽃줄기 길이는 30~40cm.
줄기 끝에 한 개의 꽃이 밑을 향해 종 모양으로 달리죠. 꽃의 겉면에도 흰털이 빽빽.
꽃받침잎은 6개로 긴 타원형. 길이 35mm, 나비 12mm.
안쪽에는 털이 없습니다.

꽃가루받이가 이뤄지면 숙였던 고개를 들며 열매를 맺어요. 열매가 흰털로 덮여 호호할머니 백발 같죠.
긴 달걀 모양의 열매 끝에 4cm 내외의 암술대가 끝까지 남아요.

독성이 강한 유독식물이래요. 특히 뿌리에 강한 독성이 있어 옛날에는 즙으로 화장실 벌레, 그러니까 구더기가 생기는 걸 막았답니다.
한방에선 뿌리를 해열, 소염, 살균 등에 처방해요. 이질 등의 지사제로, 민간에서는 학질과 신경통에 쓴답니다.

백두옹은 <삼국유사> 화왕계(花王戒)에 나오는데요.
설총(薛聰)이 신문왕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지은  우화(寓話)가 화왕계랍니다.
이야기에 꽃의 왕인 모란, 간신인 장미(薔薇), 충신인 백두옹(白頭翁)이 등장하죠.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옛날 화왕께서 이 세상에 나와 꽃을 피웠는데 세상 어떤 꽃보다도 예뻤다.
이를 본 많은 꽃들이 화왕을 보러 왔다. 그 중 장미와 백두옹이 자신을 등용해 주기를 바랐다.
화왕은 누구를 택할지 고민하다가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는 드물다.'는 장부의 직언을 듣고 백두옹을 택하게 된다."

고개를 숙인 모습 때문일까요?
꽃말은 ‘슬픈 추억’, ‘사랑의 굴레’, ‘사랑의 배신’, '충성'.
꽃말 '슬픈 추억'앞에 편에 소개한 복수초의 서양 꽃말과 같군요.

<논어> 첫머리 학이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배우고 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열(說)은 현재는 주로 '설'로 읽지만, 기쁠 열(悅)과 같은 뜻이고 '열'로도 읽습니다.

락(樂)은 즐거울 락(낙)이고요.

(悅)에는 마음 심 변을 쓰고요.

(樂)은 현악기 모양에서 유래되었답니다.


열과 락의 차이, 즉 기쁨과 즐거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배운 것을 익힐 때, 안에서 솟아나는 내밀한 기쁨.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벗과 함께할 때 얻는 즐거움.

기쁨은 안으로부터 솟아오르고, 즐거움은 밖에서 오는 게 차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기쁨은 내가 만들 수 있으니 능동적, 즐거움은 내게 다가오는 것이니 수동적.


둘 중 어느 게 나은가요?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까지는 없는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안으로부터의 내밀한 기쁨이 밖으로부터 오는 즐거움보다는 낫다는 의미에서, <논어>의 맨 첫 글자를 배울 학(學)으로 내세운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고개가 절로 수그러진다.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발밑의 바위와 대화하는 것 같기도 한 할미꽃.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무얼 그리 곰곰이 생각하는지, 따스한 햇볕을 등지고 땅을 향해 고개 숙인 할미꽃.

저로 하여금 곰곰 생각하게 만드는 꽃, 할미꽃입니다.



선거철이면 할미꽃보다도 더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실대는 정치인들.

당선되면 오만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죠?

화왕계의 백두옹이 보여주는 우직한 '충성'은커녕 '사랑의 배신'으로 응답하곤 하니 그 존재 자체에 짜증날 수밖에요.

그러지 않을 사람 뽑기는 화왕이 신하를 뽑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내 한 표가 소중하므로 투표는 해야지요.


■■ 앞에서 말씀드린 의정부시에서 진행하는 올해 야생화 강좌 중 사진촬영기법 강의 추가 모집 공고가 문자로 왔기에 소개합니다.


의정부 신곡2동 "사진촬영기법" 강의 추가 접수합니다.

접수처: 신곡2동사무소 별관 3층 접수처로 방문접수, 강의는 4/2(화)부터 매주 화요일 오전 09:30~11:30분까지 3층 문예창작실에서 진행합니다.

* 강의실에서 촬영 이론과 실습 교육 후 수도권 일대로 야생화 단체 촬영을 자주 다니는 프로그램입니다.


2024년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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