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과 추석 후 이혼율이 크게 높아지곤 하지요? 명절 전후로 어김없이 매스컴의조명을 받는 그 명절증후군이올해는 어떤 모양새로 변모되었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큰 행사 뒤켠엔 누군가의 희생이나 헌신이 있게 마련인데요.
희생과 헌신이 자발적이고 기꺼운 마음에서가 아니라, 관습과 강요와 타의에 의한 거라면 엄청난 스트레스겠지요. 그 희생 당사자들은 몸의 피곤함보다는 마음의 서운함 탓에 결별과 같은 중대 결단을 내린다고 해요. 겉으론 풍성해도 안으로 원망만 잔뜩 쌓인다면 명절은곧 지옥의 시간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어쨌든 설이나 추석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기쁘고왁자하게 만나는 날입니다.
엄청난 교통 체증에도 어김없이 연출되는 민족대이동은 오로지가족과의 만남을 향한 대행진인 셈이지요.
추석 무렵 꽃을 피우는 꽃무릇. 잎은 꽃을, 꽃은 잎을 보지 못한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여기, 가족과의 만남에 있어서만큼은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꽃이 있습니다.
봄철 줄기와 잎이 시들어 사라진 자리에서 추석 무렵 붉은 꽃이 피고, 꽃 진 자리에서 잎이 돋아나 추운 겨울을 나는 석산(石蒜)이 바로 비운의 주인공입니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화엽불봉초(花葉不逢草)라고도 불리는 무리 중 하나인데요.
우리말 이름은 꽃무릇.
이렇게 서로를 보지 못해 그리워하는, 그래서 상사화(相思花) 속으로 분류되는 꽃들이 더 있습니다.
자생종으로는 백양꽃, 상사화, 분홍상사화, 흰상사화, 붉노랑상사화.
재배종으로는애기석산, 붉은백양꽃, 붉은상사화, 연노랑상사화.
한뿌리에서 난 가족임에도 평생 서로를 못 보는 비운의 주인공들이 의외로 많지요?
그중 꽃무릇은 하필 추석 전후에 그 핏빛의 간절한 그리움이 무리를 지어 피는 데다, 모양 역시나 하늘을 우러러 타오르는 불꽃같아요.
저 또한 이즈음이면 그리워져두리번두리번 찾아보는 꽃입니다.
수선화과 상사화속의 여러해살이풀. 중국 양츠강 유역이 원산지인데요.
중국으로부터 문물이 전해져 오는 순서에 따르면 한반도 다음 일본일 텐데, 일본에서 들여왔다는 설도 있군요.
어쨌거나 외지에서 들어온 귀화식물입니다.
전북 고창 선운사의 꽃무릇 군락지.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절이나 그 근처 산기슭 또는 풀밭에서 무리 지어 자라 장관을 이뤄요.
일본에서는 무덤가나 인가 근처의 논둑 밭둑에 많답니다.
꽃은 추분을 앞둔 이맘때 핍니다. 잎이 없는 알뿌리 또는 비늘줄기에서 길이 30∼50cm의 꽃줄기가 나와요. 그 끝에 빨간 꽃이 산형꽃차례를 이루며 피지요. 총포는 길이 2∼3cm의 줄 모양 또는 피침 모양. 작은 꽃자루는 길이가 6∼15mm. 화피 조각은 6개. 거꾸로 세운 바소꼴로 뒤로 말리고, 가장자리는 물결 모양으로 주름져요. 암술은 1개, 수술은 6개로 꽃잎보다 길게 나옵니다.
꽃도 화려하고 암술과 수술이 있지만,향기가 거의 없고씨앗도 잘 맺지 못해요.
생물학적으로는 3배체식물이기 때문이라는데요.
이는염색체의 수가 기본수의 3배인 세포 또는 개체를 말해요.
수선화, 튤립, 씨 없는 수박과 같이
2배체식물과 4배체식물의 교배로 생기는데요.
참나리, 붓꽃, 식용 바나나 등은 자연계에서 우연히 발생한 것이랍니다.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3배체식물은 수정할 때 핵분열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씨앗이 생기지 않는다는군요.
화려한 색의 꽃에 암술과 수술이 있지만 향기도 없고 씨앗도 맺지 못한다. 사진= '야생화는 내친구' 블로그.
번식은 뿌리의 일종인 비늘줄기로 합니다.
씨앗이 아닌 뿌리로 번식한다는 건, 유전자가 똑같은 자기 복제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그 뿌리를 옮겨 심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석산(石蒜)은 돌마늘이라는 뜻인데요. 이 알뿌리가 돌처럼 단단하고, 마늘 향을 내기 때문이랍니다.
꽃이 진 다음 난초를 닮은 짙은 녹색의 잎이 나와 겨울을 납니다. 길이는 30∼40cm. 잎은 이듬해 늦봄과 초여름 무렵인 6월쯤 시들어 사라집니다. 잎모양이 ‘무릇’을 닮았지만 꽃이 화려해 '꽃무릇'으로 불린다네요.
꽃무릇은 사실, 유용성면에서는뿌리가으뜸입니다.
독성이 강해 식용할 때 주의가 필요하지만, 가공하기에 따라 마늘 대용으로, 녹말이 많아 흉년에 구황(求荒) 식물로도 쓰여요.
뿌리를 땅속 깊은 곳으로 잡아당기는 견인근(牽引根)이 함께 있어요. 흙을 뭉치는 역할을 하기에, 홍수에도 논둑이나 밭둑이 무너지는 걸 막는 역할도 한답니다.
평생 서로 만나지 못하는 꽃무릇의 꽃과 잎. 뿌리인 비늘줄기와 견인근. 출처= 송훈, <우리꽃 세밀화>.
절에서는 뿌리를 캐어 풀을 쑵니다.
불경 책을 제본하거나 탱화 뒷면 종이를 덧대는 접착제로 쓰는데,수천 년이 지나도좀이 슬지 않는대요.
대규모 군락지가 절에 많은 실용적인 이유입니다.
전북 고창 선운사, 전남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가 3대 군락지로 유명하지요.
불교에서 꽃무릇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실 때 하늘에서 만다라화, 마하만다라화, 만수사화, 마하만수사화가 꽃비를 이루어 내렸다고 하는데요.
이 가운데 만수사화(曼珠沙華)가 바로 꽃무릇이랍니다.
석산은 한방에서 쓰이는 약재 이름이기도 합니다. 인후염이나 편도선염에 쓰이고요.
이뇨, 거담, 해독, 항암 작용이 있답니다.
학명은 Lycoris radiata.
영어명은 Red Spider Lily, (붉은 거미백합).
별명은 노아산, 산오독, 산두초, 야산, 붉은상사화, 가을가재무릇, 바퀴잎상사화, 조산(鳥蒜), 촉산.
일본에서는 열반 언덕에 피는 꽃이라고 해서 피안화(彼岸花). 붉은색과 독성 때문에 '죽음의 꽃'이라고 부른답니다.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 애절한 사랑. 슬픈 추억,체념,단념,독립, 참사랑.
거의 모두 슬픈 꽃말이군요.
■ 추석지난 뒤 부부간에서먹서먹 어색해 지셨습니까?
꽃무릇을찾아가 보세요. 꽃이 저토록 붉은 게 잎을 향한그리움 때문이라고한다면, 함께있는 그 자체가행복이라고 꽃무릇은 온몸으로 알려주고있는 거겠죠? 사랑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사랑하는 게 우리 삶의 정답이라고외치기 위해 저리도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건 아닐까 싶네요.
고창 선운사.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 그런데, 사랑하기란 왜 어려울까요?
'나'를 앞세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슨 문제에서든 결국은 '나'가 문제죠? 그런 나를 없애고 또 없애고 모두 없애버려서 새롭게 거듭나는 것 외에방법은 없나 봅니다.
니체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라고 했어요. 자기 자신을 알기가 가장 어렵다는 뜻이겠죠?
법정스님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라는 방법을 제시했어요.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는 뜻 같아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죽을 때까지 알기 어려운 게 바로 '너 자신'이라는 뜻은 아니었을까요?
몽테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저 자신을 이해하는 게 경험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해서 위안을 줍니다.
'네 안에 부처 있다.', '네가 곧 부처', '해탈'. 이 명제들 역시 '자기 자신을 아는 순간'의 경지를 달리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처럼 자기를 알기는 너무나도 지난한 일이라고 하니, 한편으론 안심이 되죠?
'그래, 죽을 때까지 나를 아는 일에 게으르지 않겠다.' 이 정도의 결심만 가져도 기본은 하는 삶이 될 테니까요.
■■■ 내 옆에 있는 배우자의 현재 모습은, 내가 그를 대했던 과거의 총합이자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서로는 서로에게 거울이 되는 것이지요.
자신을 알기 위해 들여다볼 일차적인 거울은 바로 곁에 있는 그의 현재 모습인 셈입니다.
어떤 관계를 막론하고아무래도 어딘가 잘못된 듯하다면, '나'를 없애는 일을 첫 단추로 삼는 게 맞지 않을까요.
꽃무릇처럼, '나'가 없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피어날 수 있는 건 '원망'이나 '미움'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