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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나물 Jun 24. 2024

미워했지만 완전히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직업적 특성으로 인해 빠르면 두 달에 한 번 늦으면 세 달에 한 번씩 볼 수 있는 분이었다. 다소 무뚝뚝하고 다혈질적인 면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집에 오시면 어린 언니와 나를 위해 맛있는 경양식 돈가스나 치킨을 직접 튀겨주시고, 배에 발을 대고 우리를 번쩍 올려 비행기 놀이를 해주셨다. 인상이 차갑고 말투도 거칠어서 무서웠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를 좋아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 아버지는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두셨다. 오랜 외부 생활을 마치고 우리와 함께 살고 싶다는 것이 퇴사 이유였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새롭게 구하는 직장마다 오래 근무하지 못하시고 성질에 못 이겨 그만두는 일이 빈번했다. 눈이 불편한 어머니께서 식당에서 서빙을 하며 벌어오시는 적은 돈으로 우리 가족이 먹고, 살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부모님은 돈 문제로 자주 다투게 됐다. 잦은 다툼은 점점 크게 번져 결국 아버지는 어머니께 폭력을 가하게 되었다. 안방 문이 닫히고 아버지의 욕설과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언니와 온몸을 떨며 손을 잡고 그 시간을 견뎠다. 그 이후 아버지는 매일 술을 드시고 화가 나면 어머니께 폭력을 썼다. 폭력이 지속되면서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우리와의 행복한 생활도 나의 아버지에 대한 마음도 산산조각이 났다.



     

  중학교 2학년 평범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겪는 사춘기 또한 나는 참아냈다. 아버지한테 사춘기를 부리면 당연히 받아주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가뜩이나 힘든 어머니께 또 다른 힘든 상황을 얹어드리고 싶지 않아 이유 없이 짜증이 나는 날에는 친한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질렀었다. 그때 2살 많은 같은 학교 언니와 가정환경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힘들 때 이야기를 들어주며 서로 힘이 되어 주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폭력은 가장 심각해졌다. 학교에 가기 전 어머니께 폭력을 써서 그걸 말리느라 학교에 지각하는 일이 잦았고, 너무 힘들고 지쳐서 다 큰 고등학생인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힘조차 남아있지 않아 엉엉 울면서 등교했었다. 그때 나의 사정을 알고 계셨던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게 학교 옆에 있는 기숙사에 들어가길 권유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내가 선생님께 울면서 한 말이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럼 아빠가 엄마를 때릴 때 누가 엄마를 지켜줘요” 나는 내가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이 엄마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 같아서 너무 괴로웠다.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네가 엄마 아빠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엄마 아빠가 너를 지켜줘야 하는 거야. 너의 인생을 위해서 너라도 너를 지켜줘야 해!”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를 지키기 위해 기숙사에 들어갔다. 집에 남은 어머니가 걱정되어 매일 전화를 드렸는데 전화 너머 들리는 어머니는 항상 웃으면서 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으면 안심이 되어 나는 기숙사에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괜찮지 않으셨다. 나는 시각장애로 인해 어머니의 얼굴을 정확하게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었는데 대학에 들어간 언니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을 때 입술이 다 터져있다고 말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머니께서는 거짓말을 하셨던 거였다. 아버지가 미웠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는 크고 작은 사고를 치며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나를 힘들게 했다. 아버지와 관계 회복을 위해 내가 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할 때면 잦은 실망감을 주시고 모든 화살을 우리 탓으로 돌리셔서 결국 아버지와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내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마칠 무렵 기숙사에 가져갈 짐을 상자에 담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짐을 모두 챙기고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후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내 인사에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고 그게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개강을 하고 2주일 뒤 집에 왔을 때 부모님은 결국 이혼하셨고 아버지는 모든 짐을 챙겨 집을 나가셨다.

     


  3년 전 아버지께서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에 계시면서 어머니, 언니 그리고 내가 너무 보고 싶고 미안하다고 하셨다는 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나는 그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을 텐데 돌아가시고 듣게 된 말에 나는 아버지에 대한 오랜 미움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아빠를 미워했지만 완전히 미워하진 않았어요.

이젠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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