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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옹이 Mar 14. 2017

일상살기

아이를 낳고 키우며

점점 긴 글을 쓰는 게 힘들어진다. 보고서에 익숙한 개조식 문구의 나열들, ~함. ~됨으로 명사형 종결어미로 끝내는 글이 익숙해 졌기 때문이다~ 라고 편한 핑계를 대고 싶다. 하지만 솔직히 그저 나는 새로운 담론과 텍스트를 소화하기엔 너무 게으르고 지금까지 곱씹던 글들을 살아내기엔 하루하루가 너무 버겁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싶은 일들도 너무 많다.


20대의 전부를 그리고 30대의 초반을 특별하고 설레는 일로 매일을 채워왔다. 섹시하고 그럴싸한 담론으로 뇌를 채우고 날선 논리로 누군가를 재단하고 비판했다. 그렇게 비판하면 나는 해당 비판에서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깨달았다. 사람이라는 것은 나의 생각보다 훨씬 입체적인 존재였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이 세상은 좀 복잡한 게 아니었다. 원론적인 입장을 갖고 세상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뭐든 설명이 가능했지만 결국 그건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아이의 출생과 함께 내 삶은 아주 지긋한 일상으로 채워졌다. 퇴근하고 아이가 어지른 방 치우기 쌓인 젖병 설거지하기 육아에 지친 아내의 말동무하기 그러면서 꾸벅 졸다 하루를 제대로 마무리 한지도 모른 채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그런 하루들 말이다.


일상은 흔히 미디어에서 보잘 것 없고 지루하고 무료함으로 상징된다. 맞는 말이다. 솔직히 지루하고 무료하다. 이 순간을 타개할 까리한 일탈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행도 좋고 맛집도 좋다. 오랜 친구와의 만남도 좋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적어도 내가 안고 있는 책임감의 범위 내에서는.


신기하게도 이 지루한 일상들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조금씩 체화된다. 아이를 들어 올려 안는 동작이 익숙해진다. 한 달 전보다 지금은 더 수월하게 아이를 재울 수 있다. 설거지에 소요되는 시간이 짧아진다.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지면 다시 채워놓을 줄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상을 반복하는 가운데 역사에 남을 한 장면이 우리의 시간을 지나간다. 이번 사태를 지나며 사람들이 열광하는 지점은 어쩌면 대단한 영웅이 나타나 단번에 해결했다기 보다는 우리네 장삼이사들이 진득하게 촛불을 들고 각자의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정치인, 언론인, 법조인이든 그리고 예술가이든- 자기 일에 충실했을 때 나타난 결과라 본다.(그래서 특정한 누구를 굳이 영웅으로 만들려는 설레발이 별로 달갑지 않다.) 


시민으로서 그리고 직업인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하루에 충성하며 살아내며 이뤄낸 이 승리의 경험. 이 효능감은 꽤나 오랫동안 우리의 역동의 근원이 되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 감히 소망해 본다. 죽으란 법은 없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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