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라는 존재 방식에 대하여
한 문학비평가 선생님과의 대화 중, 인상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한강 작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겉으로 보기엔 내성적이고 조용한 그가,
생각보다 많은 방송과 다큐멘터리, 협업 작업에 참여했다는 것.
음반을 내기도 했다는 말엔 고개를 조금 갸웃했지만,
곧 이어진 한마디에서 나는 멈칫했다.
“그건 소설가로서는 사실 어려워요.
그런데 시인의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말을 듣는 순간, 몇몇 시인의 얼굴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한결같이 조용했고, 단어를 아끼며 말했고, 눈빛에 무언가 오래된 침묵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언제나 그 자리가 하나의 무대처럼 느껴졌다. 낭독회든, 인터뷰든, 사진 한 장을 찍는 순간에도 그들은 스스로를 일정한 거리와 리듬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관종력이라는 단어는 다소 장난스럽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인들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체화된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중심에 두는 방식. 그러나 그것이 전면적이거나 날것이 아니라, 비유와 운율과 형식의 층위 안에서 드러나는 방식.
시인은 드러나는 사람이다. 등장인물 뒤로 숨지 않고, 문장의 행간에서 나오지 않고, 감정을 구체적인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 자체를 이미지로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 그 이미지 속에 들어가 움직인다. 내밀하다는 것과 조용하다는 것은 때로 가장 정교한 형태의 무대가 된다. 그 무대 위에서 시인은 몸을 낮추는 방식으로 중심에 서고, 말을 아끼는 방식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며, ‘자기 없음’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기 있음’을 관철시킨다.
소설가는 이야기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가지만, 시인은 자기 삶의 세계를 시처럼 만든다. 삶의 모든 장면을 시의 형식으로 감각하고, 배열하고, 연출한다. 그러니 시인은 언제나 조금은 존재 전체가 하나의 문장인 사람처럼 느껴진다.
관심받고 싶어서라기보다, 관심이 향하는 방향에 자신이 놓일 수 있도록 고요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스스로를 ‘형식’으로 만든 사람들. 그게 내가 레지던시에서 마주한 시인들이 가진, 특유의 ‘관종력’이었다.